한남대 설립자,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한남대 설립자,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윌리엄 린튼 선교사 가문, 4대에 걸친 한국사랑 ‘눈길’
  • 박해용 기자
  • 승인 2010.02.23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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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인돈 부부와 네 아들의 모습 왼쪽부터 윌리엄, 드와이트, 휴, 유진.
일제 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에 앞장서고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외국인 선교사의 각별했던 한국 사랑이 뒤늦게 세상에 알려져 눈길을 끌고 있다.
한남대학교 설립자인 윌리엄 린튼 선교사에게 제91주년 3·1절을 맞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시상식은 내달 1일 3·1절 기념식이 열리는 천안시 병천면 유관순기념관에서 거행될 예정으로 수상은 유족을 대표해 손자인 인요한(John Linton) 신촌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이 받게 된다.
한남대에 따르면 이번 애족장이 추서된 윌리엄 린튼 목사가 100년 가까이 이어진 린튼 가문과 한국과의 첫 인연은 바로 지난 1912년 대학을 갓 졸업한 21세의 나이에 미국 남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발을 디디면서 시작됐으며 그는 이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48년동안 호남과 충청 지역에서 선교 및 교육사업에 헌신했으며 군산영명학교에서는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한국말로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고 전주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교장을 역임했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외국인이었지만 한국의 독립을 위해 투신했다.
린튼 선교사는 지난 1919년 전북 군산의 만세시위 운동을 배후 지도하고 3·1운동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지지를 호소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린튼 선교사는 3·1 만세운동 직후인 지난 1919년 8월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미국 남부지역 평신도대회에 참석해 한국의 처참한 실정과 독립운동의 비폭력 저항정신을 전했다.
또 신흥학교 교장 당시에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를 자진 폐교해 지난 1940년 일제로부터 추방됐다가 광복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한국전쟁의 와중에 많은 선교사들이 해외로 피했으나 그는 ‘대피명령’이 떨어진 상황에서도 전주에 남아 성경학교를 운영했으며 전쟁 막바지에는 부산에서 선교활동을 계속하며 한국 땅을 지켰다.
린튼 선교사는 말년에 암 투병을 하면서도 지난 1956년 대전기독학관을 설립했고 지난 1959년 대전대학(현 한남대)으로 인가를 받아 초대학장에 취임했다.
병 치료도 미룬 채 한남대 설립에 매진했던 그는 지난 1960년 6월 미국으로 건너가 병원에 입원했으나 지난 1960년 8월에 숨졌다.
린튼 선교사의 각별했던 한국사랑은 가족과 후손들에게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휴 목사의 아들 스티브(59)는 지난 1994년 유진벨 재단을 설립하고 북한 의료지원 사업을 펼치며 모두 400억원이 넘는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북한에 지원했다.
한편 한남대는 설립자 윌리엄 린튼 선교사를 기리고자 지난 1994년 그의 한국 이름을 딴 인돈학술원을 설립하고 해마다 각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인사에게 인돈문화상을 시상하고 있다.
또 국제학부인 ‘린튼글로벌칼리지’를 설립해 우수한 국제화 인력을 양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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