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경주세계문화엑스포2006’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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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 문명이 오늘날에 주는 의미(1)
  • 서규석 박사
  • 승인 2007.02.14 20: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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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나짱(나트랑)의 포 나가르 사원에 있는 비문. 힌두문명은 크메르, 베트남 남부, 인도네시아 도서부의 기층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불교 혹은 이슬람으로 개종 이후에도 생할양식의 저변을 흐르고 있다.
▲세계문화사의 입장에 본 힌두문명의 수동성, 그래서 15세기 동안 유지된 문명

이상과 같이 서기 1세기 경부터 15세기까지 힌두문명이 성장하고 쇠퇴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 사실로부터 명백해진 사실은 동남아시아는 인도, 중국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의 파장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인도의 위대한 정신적 문명을 수용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의 문명에서 동남아시아는 예술의 영역을 제외하면 인류의 지적 재산을 풍부하게 하는 데 기여하지는 못하였다.
동남아시아의 문화와 문명이 세계, 특히 유럽인들로부터 무시된 데는 완전히 수동적인 성격의 탓도 있다.
인도가 없었더라면 동남아시아의 고대역사는 거의 알려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세데스는 이를 가리켜 “우리는 자칫 뉴기니아, 오스트레일리아의 과거에 대하여 알고 있는 정도보다 더 깊은 무지를 경험했을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동남아시아의 각 민족은 역사를 소유하면서 고귀한 칭호에서부터 특권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인도로부터 혜택을 누려왔다.
온도문명은 민족이라는 위대한 관념을 제공하였다.
힌두 문화는 그러나 군대를 통해서 정복을 실현하고 중국문화를 강요한 방식과는 대조를 이룬다.
동남아시아의 힌두화된 국가들은 인도의 정치적 속국이 결코 아니었으며, 단지 문화적인 식민지였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다.
힌두문화는 항해자들, 그리고 바라문과 불교승려를 통해서 토착 사회와 접촉하여 변형을 지속하며 문화를 발전시켰다.
지금의 동남아시아 사회가 고전적 형태의 힌두 신앙, 즉, 시바신앙, 비슈누 신앙,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는 소승불교, 대승불교는 사라졌다하더라도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프놈펜과 방콕에서는 매우 혼합된 혈통의 바라문들이 불교를 신봉하면서도 그 특유의 쪽진 머리와 띠를 두르고 힌두 시대로부터 내려온 유산인 왕실의 모든 의식을 집전한다.
물론 이 의식은 오직 왕실에서만 준수되는 잔존물이며 일반대중과는 관계가 없는 것들이다.

▲동남아시아 문화의 기반을 마련한 힌두문명
12세기와 13세기에 동남아시아는 인도로부터 새로운 기증품으로서 싱할리 불교를 받았다.
이 신앙이 국민 대중 속에 침투하였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캄보디아, 타이, 라오스, 미얀마에서 불교의 우주개벽설, 우주론, 업보론, 윤회론은 비구들의 설법에 의해 하층계급에까지 깊숙이 각인되었다.
고대 인도의 문화적 유산은 종교적 유산보다도 더욱 더 분명하다.
힌두화된 시대 전체를 통하여 라마야나, 마하바라타, 하리밤샤, 그리고 푸라나(고담집)는 지방문학의 유일한 소개가 아니었다하더라도 주요한 감흥의 원천이었다.
인도차이나 전체, 그리고 말레이시아 및 자바에서 이 서사시와 신화적인 문학이 오늘날에도 고전극, 무용, 그림자연극, 및 인형극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
인도 외부지역의 극단에서 극단까지 관객들은 라마 왕자와 시타 공주의 불행에 눈물을 흘리고, 붓다의 선행에 감동받으며 자신들이 참여하는 무대공연에서 각자의 독특한 판토마임 성격을 연출한다.
팔과 다리의 위치 및 움직임, 손동작은 마치 인도의 안무처럼 행동을 유발시키고 감정을 표출할 수 있도록 주제를 암시하는 침묵의 언어를 구성한다.
인도 법률의 영향도 이에 못지않게 강하였다.
다르마샤스트라(율법론)와 특히 제일 유명한 “마누법전”은 힌두 왕국의 지방적 관습을 규정하는 틀을 형성하였다.
이것은 로마 제국이 멸망한 폐허 위에 건설된 야만인 사회에 라틴어 법률이 기능했던 것과 다소 유사한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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