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청빈(淸貧)은 없다
[문화 칼럼]청빈(淸貧)은 없다
  • 김승룡 교수·한문학
  • 승인 2012.01.17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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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지의 한 꼭지에 불과하였던 ‘경제’가 독립하여 또 하나의 일간지로 탄생한 지도 이미 오래전 일이다.
하루 종일 투자방송을 틀어놓고 세상의 흐름을 듣는 택시 기사, 볼펜을 팔면서도 주식시세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문방구 아저씨의 모습은 흔한 일상일 뿐이다. 하나 지극히 평범한 가운데 진리가 들어있듯이 이런 풍경들은 그 자체로 우리의 삶이기도 하다. 비록 누구도 돈을 찬양하는 자가 없지만 말이다.

▶ 가난을 직시하라
처음에 사람들은 서로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하여 실물을 맞바꾸었고, 그 편의를 돕기 위하여 돈이 고안되어 거간노릇을 하였다. 그러다 실물이 없이도 돈만으로 서로의 필요를 충족하게 되었다. 아니 그런다고 믿게 되었다. 어느새 실제 삶은 돈에 장악되어서 돈 없는 삶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굳이 자본의 시대가 아니라도 그러했다.
옛사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000년 전으로 되돌아가 보자. 참혹한 무신집권기에 벼슬에서 밀려난 고려인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고위 관료에게 송곳이라도 꽂을 만한 땅을 구하였고, 저들이 보내준 쌀과 붓에 무척 고마워하였다.
그들은 가난 속에서 돈의 냉혹함을 처절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불의한 권력을 비판하기에 앞서 삶을 구걸하였던 것이다. 이들을 두고 지조가 없다 조롱하는 것은 치기 어린 냉소일 뿐이다. 그러나 이는 특수한 경우로서, 가난을 자부한다고 하여 모두 사실로 믿을 것은 아니다. 적어도 고금의 지식인에게 가난이란 대개 경제적 불평등, 정치적 소외에서 오는 외로움을 표현한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3품 벼슬아치 많지만/가난한 사람은 나 혼자라오//굶주린 종은 배가 고파 집을 못 짓고/파리한 말은 쓰러지고 땔나무도 바닥났네”(‘이백전의 시에 화답하다’) 고려의 이규보가 지은 시이다.
당시 종7품이었던 노극청은 은 12근에 집을 팔았다고 한다. 은 12근이면 현재 시가로 대략 1억3200만원이다. 3품이라면 녹봉이 7품의 수배는 될 터이니, 이규보의 말은 엄살이 심해도 지나쳤다.
그가 “나는 한평생 가난에 익숙하여/요즘은 나물마저 이을 수 없네”(‘이정에게 화답하다’)라고 한 말도 참말 경제적 결핍이라고 믿기는 힘들다. 다만 이규보가 정치적 이끗을 위해 부정비리를 저지르기보다는 영혼의 자유를 희구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의 가난 타령은 자신의 꿈을 향한 허기 정도로 읽을 수 있다. 이런 투정은 뒷날 선비들의 안빈낙도를 부조(浮彫)하는 조건으로 상투화되고 이념화한다.
“집이 가난하니 안빈낙도 제격이라/내가 갖고 있는 것은 푸른 담요 한 장일세//아침저녁으로 그저 시간을 보내면서/세상의 변화 무심히 지낸다오”(이색, ‘집이 가난하여’) 사실 이는 거짓말이다.
이색만큼 고려 말 정국을 주도해 간 이도 없지 않던가? 허망한 수사로 변해버린 가난 앞에서 주린 배를 움켜쥔 백성들의 얼굴이 보일 리 만무하다. 궁핍은 이제 인내의 대상이 되어버렸고, 그 위에 청빈(淸貧)이란 도금까지 입혀졌다.

▶ 복지는 인간으로서의 존재 이유
하나 이를 현실 속 궁핍으로 환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현실 속 백성의 가난을 직시하고, 그 원인인 재부의 불평등을 바로잡아 주면 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한 마을 전체가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이를 구호하기 위해 긴급 투입된 한 봉사자가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식량이 있는 곳을 찾았다. 식량을 나눠줄 것을 요구하자 “나는 장사꾼이다.”라고 버젓이 말하며 돈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세상의 가난은 하늘이 내린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재앙이었다.
복지가 세상의 화두이다. 나누는 가운데 인간적 신뢰가 생기고, 그 속에서 창의적 공생이 가능하기 때문에 ‘복지(福祉)’인 것이다. 복지를 먹성논쟁으로 타락시킨 우리네 수준을 보면서 내일(‘사회복지의 날’) 하루만이라도 복지 속에 담긴 인간으로서의 존재 이유를 느끼길 기대해 본다. 돈의 위력이 강해질수록 가난은 더욱 이미지화된다. 두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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