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선생 순국 71주기를 맞아
단재 신채호선생 순국 71주기를 맞아
  • 황인산/ 대전지방보훈청 보훈과 선양계장
  • 승인 2007.02.20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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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1일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중국 여순 감옥에서 순국한지 71주기가 되는 날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국독립을 위한 무정부주의 운동 등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중국인 유병택이라는 가명으로 일본에서 위조지폐를 사용하려다 발각되어 대만 기륭항에서 체포되어 2년간의 재판 끝에 1930년 5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수형번호 411번으로 중국 여순 감옥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단재 선생은 형기를 3년 앞두고 지병이 악화되어 1936년 2월 21일 뇌일혈로 고국광복을 보지 못한채 한평생 일제와 비타협적인 투쟁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순국하였다.
선생은 수형 생활 중 병보석으로 출옥할 기회가 있었으나 보증인이 친일파라는 이유로 거부하였으며 “내 죽거든 시체가 왜놈의 발길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해 바다에 띄워라”라는 유언을 남기었다.
유해는 선생의 뜻대로 화장되었으며 그 후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일본인들의 눈을 피해 천안·청주를 거쳐 선생의 먼 친척벌인 면장의 묵인하에 고향땅에 암장하였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 선사가 돌을 깍고 오세창 선생이 글씨를 새겨 선생의 묘소 앞에 비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고령 신씨로 1880년 12월 8일 할머니 외가 동네인 대전시 중구 어남동(도리미 마을)에서 출생, 7살 때까지 이곳에서 자랐으며 아버지 신광식이 사망하자 아버지의 고향인 청원군 낭성면으로 이사를 하여 할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배우며 성장했다.
선생은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이상재, 신흥우, 김규식등과 함께 활동하고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의 예리한 필치의 논설기자로 활동했다. 여기서 이순신전·을지문덕전·최도통전 등을 연재해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했다.
1910년 조선의 일제 강점이후 국외로 망명하여 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하는 한편, 1914년 윤세복의 동창학교에서 국사교육을 시키며 조선사를 저술했다. 또 1922년에는 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의 고문으로 참여해 의열단의 독립운동노선과 투쟁방법을 천명하는 그 유명한 조선혁명선언서를 작성했다.
그 후 선생은 칩거하면서 국사연구에 몰두하여 조선상고사·조선상고문화사·조선사연구초 등을 집필해 우리의 근대 민족사학 정립에 크게 기여를 하였다.
선생의 순국일을 맞이해 독립운동가이며 역사학자, 언론가로서 한평생을 일제와 타협하지 않으며 꼿꼿하게 살아오신 선생의 불굴의 혼을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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