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장군의 동상
[기고] 장군의 동상
  • 송근배 동의대 교수·조각가
  • 승인 2012.08.21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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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대학 시절, 나는 남들보다 작품을 유달리 크게 만들기를 좋아했다. 하루는 지도교수인 김종영 선생이 내 소조(塑造)작업대 주변을 한 바퀴 돌더니 툭 한마디 던지셨다. “자네 지금 새마을 사업하나” 순간, 저마다 작업에 열중하느라 정적이 흐르던 작업실이 떠나갈 듯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낯이 뜨겁다.
선생님은 작은 형태로도 충분히 담을 수 있는 내용을 굳이 크게만 만들려고 한 우직하고 촌스런 나의 욕심을 찔러 보셨던 것이다.
◇ 크기만 앞세운 영웅주의적 동상들
광화문에 세운 이순신 장군 동상을 만들 때, 대학 재학 중 잠깐 제작팀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런데 동상이 얼마나 크던지 화실 천정을 헐어낸 지붕 위로 장군의 상체가 올라갈 정도였다. 허리와 요대, 그리고 투구 위의 창끝이 작업실 천정을 찌를 듯했다. 동상 제작의 소조 점토(粘土)작업 진행이 중반을 넘었을 때, 예고도 없이 선글라스를 낀 사람이 왔다. 아마 군 출신인 것 같았다. 선생님이 부재 중이어서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는 뒷짐을 지고서는 “다 되어갑니까?” 하고 우리들에게 물었다. 선생님을 대신해서 선배 중 한사람이 “예, 다 되어갑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그는 먼 발치에서 대강 훑어 보고 “좋습니다.” 하고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기념 조형물 동상 소조 작업을 생전 처음 보았고, 거대한 장군의 동상 크기에 위압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날 작업이 끝나고 뒷풀이 자리에서 우리는 그 사람의 흉내를 내면서 낄낄거렸다. 딱 두 마디. “다 되어갑니까? 좋습니다.”
1980년대 초, 전람회를 하러 도쿄에 갔을 때 간다 고서적 거리에서 우연히 북한 조각 작품 화집을 발견했다. 대부분 혁명을 주제로 하거나 주체사상을 나타낸 작품이어서 거부감이 일었다. 하지만 역동성과 기교 면에서는 뛰어난 작품들임에 틀림이 없었다. 아마도 당시 북한 조각가들은 동유럽과 러시아에서 사실주의 소조 기법을 정통으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입상으로 조성된 만수대 김일성 동상을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과 비교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크기였다. 먼 곳을 바라보면서 오른손을 번쩍 들고 서있는 포즈와 형상이 레닌 동상에서 영향 받은 것 같았다. 지구 상에 이렇게 큰 인물 조각상은 없다. 세계사 속에서 독재자들은 권력 유지와 통치 수단으로 넓은 광장에 거대한 조형물을 세우곤 했다. 따지고 보면 광화문에 건립한 장군의 동상도 순수하게 충무공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보다는 군사정권 시절에 영웅주의와 반공주의를 앞세운 충성심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조형물 아닌가.
얼마 전 박정희 동상 건립위원회에서 동상 제작을 발표했다. 동상 크기와 포즈가 김일성 동상과 흡사하다는 여론에 몰려 계획을 변경했다고 한다. 계획대로 동상 높이가 8m로 조성되었더라면 만수대 김일성 동상과 다를 게 무엇인가. 이 시대에 어떻게 이런 발상이 가능한 것일까.
◇ 상징 조형물은 시민들과 동화돼야
우리는 외신에서 독재자의 기념 조형물이 파괴되는 사태를 익히 보아왔다. 중동 민주화운동 때에도 후세인 동상이 4·19 당시에는 이승만 동상이 끌려 다녔고, 북한에서는 김일성 동상이 훼손되었다. 이런 사례들을 볼 때, 정치 상황이 바뀔 때마다 동상의 수모는 계속될 것이다.
상징 조형물이라는 것은 당대를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정서적으로 동화되고 존경받을만한 인물이어야 한다.
독일 라인 강변을 따라 거닐다보면 한적한 작은 공원에 소박한 동상들이 눈에 들어온다. 음악가와 철학자들의 동상과 괴테의 초상도 있다. 동상 작품의 좌대도 나지막하다. 다가가서 말이라도 걸고 싶을 지경이었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과 부인 미셸이 첫 키스를 나눈 장소에 작은 기념비가 시카고에 등장했다고 한다. 오렌지색 화강암 위에 동판으로 새겨진 다정한 모습의 오바마 부부 사진 아래에는 ‘오프라 매거진’에 실린 오바마 대통령의 인터뷰 내용 일부가 적혀 있다.
“첫 데이트 날, 나는 미셸에게 가장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사줬다. 나는 그녀에게 키스했고, 그 느낌은 마치 초콜릿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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