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칭
[기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칭
  • 송대홍 부장 태안주재
  • 승인 2012.08.27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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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국무부가 지난 16일 브리핑에서 향후 ‘위안부(comfort women)’와 ‘성노예(sex slave)’라는 표현을 함께 사용하겠다고 밝히자 일본이 당장 “성노예는 틀린 표현”이라고 반발하고 나섰다.(T.V뉴스)
일본은 그간 식민지 한국 여성을 매춘에 강제동원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해 온 만큼 그런 반응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며칠 전 “위안부가 강제동원됐다는 증거를 대라”고 한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이 망언도 국가 차원에서 자행된 성폭행을 일관되게 부인해 온 일본내 우익의 본심을 드러낸 것이다.
‘위안(慰安)’은 누군가를 위로하는 행위이며 위안을 주는 이의 마음에 자발적인 뜻이 있어야 한다. ‘위안부’라고 불렸던 이 땅의 피해 할머니들은 그 자발성을 결단코 부인하고 고통을 증언했으며 일본의 사과와 피해보상을 일관되게 요구해 왔다. 일본군을 조금도 위로해줄 의사가 없는 여성들을 끌어다 위안소에 몰아넣고 겁박해서 쥐어짠 ‘강요된 위안’이 일본이 말하는 ‘위안’의 진면목이다.
영화 ‘밀양’의 원작소설로 잘 알려진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에는 피해자의 상처는 외면하고 오직 자기가 저지른 죄로 인한 심적 고통에서 탈출하려 애쓰는 살인자가 등장한다. 소설의 주인공 여성은 자신의 아들을 유괴해 살해한 범인을 만나기 위해 범인이 수감된 감옥을 찾는다. 그런데 살인범의 얼굴 표정이 너무도 평화롭다. 범인은 하느님이 용서해 주셔서 구원받았다고 설명한다. 가해자가 신(神)을 팔아 살인자라는 죄책감으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을 본 여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다. 이청준은 이 죽음이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가해자를 지켜보는 피해자의 절망감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여성을 성노예로 삼은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부터 위안을 받은 것”이라는 일본의 궤변을 평생 들어온 피해 할머니들이 마음에도 이런 절망감이 어려 있을 것이다.
지난 3월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성노예’란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겠다고 밝힌 뒤 우리 외교부에서 ‘위안부’란 명칭을 ‘성노예’로 바꾸는 것을 검토한다는 반응이 나왔다. 그 뒤 ‘위안부’와 ‘성노예’ 중 어떤 용어를 쓸 것인가를 두고 논쟁이 빚어진 것은 ‘성노예’라는 직접적 표현이 할머니들의 마음속 상처를 건드릴 수 있다는 지적 때문이었다.
피해를 명확히 적시하는 ‘성노예’라는 표현을 포기하자는 요구가 있을 만큼 세상은 그 할머니들이 겪은 고통 앞에서 조심스러워 한다. 클린턴 장관이 ‘성노예’ 앞에 ‘강요된(enforced)’을 덧붙인 것도 일본의 만행을 적시하되 피해 할머니들의 존엄을 지키려 한 배려로 읽힌다.
위안부 강제동원의 역사를 알게 된 미국인들이 지난해 뉴저지주에 이어 올해 뉴욕주에 ‘위안부 기림비’를 세웠다.
일본 측은 민간 차원에서 설립된 이 기림비의 철거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일본은 그 비석을 볼 때마다 괴로울 것이다. 프랑스 소설가 스탕달은 “자기의 고뇌를 직시하는 것만이 자기의 마음을 위로하는 길”이라고 했다.
일본은 위안부라는 용어 뒤에 숨어있으면서 과거사 분칠을 중단해야 한다.
용기 있게 사과하고 배상하는 것만이 그들이 과거의 잘못에서 비롯된 괴로움을 벗어나는 길일 것이다.
다시 한 번 인간에 존엄성을 상기하라고 붙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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