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일논단] 아버지라는 이름
[충일논단] 아버지라는 이름
  • 서중권 편집이사
  • 승인 2012.09.10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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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가정의 중심이던 시절이 있었다. 어림짐작으로 꼽아 보니 십 수 년 밖에 안 된 일이지만 까마득한 옛날 같다.
아버지가 외출하고 귀가하실 때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인사를 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집안의 작은 소요도 아버지가 나서면 금방 정리가 되었다.
거기서 한 20여 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밥상의 서열로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했다. 온가족이 둘러앉은 대가족 식사에서 아버지의 자리는 독립된 밥상이거나 제일 윗자리였다.
밥상의 서열은 음식물의 내용으로도 확연히 구분되었다. 고봉으로 담긴 쌀밥과 고기반찬 같은 것이 있었다. 어린 자식들은 아버지가 그것들을 최대한 많이 남겨주기를 기대했다. 그 마음을 아셨는지 아버지들은 자주 그것들을 아래로 물리시곤 했다.
이 같은 밥상의 권위는 가정 대소사의 전권을 부여받은 자에게 주어진 권한 같은 것이었지만 그런 중심축이 있어 가족공동체의 유지가 가능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밥상 풍경은 어떨까? 우선 떠오르는 풍경이 주방 한쪽에 어깨를 숙이고 앉아 무엇인가를 억지로 먹고 있는 우울한 모습이다. 서너 명에 불과한 가족이 한자리에 모두 둘러앉는 경우가 한 주에 한두 번도 되지 않는 가정도 흔하다.
밥상을 차릴 시간적 여유가 없는 시간도 적지 않다. 그 때마다, 또는 귀찮아서 집 근처 식당에서 외식을 하는 게 고작인 경우도 많다. 십대나 이십대 자녀를 둔 가정은 그마저도 쉽지가 않다.
가족 모두 그 즈음이면 여기저기 정신없이 뛰어야 할 형편이어서 일가족이 한자리에 둘러앉기가 쉽지 않다. 좀 침소봉대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오늘의 가족 문제들이 같이 밥을 먹지 않아 생긴 결과라고 생각한다. 한 식구라는 말은 한 집에서 끼니를 같이 해야 성립되는 말이다.
넓게 보자면 동일한 공동체에 소속되어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경우를 포함하지만 이 역시 같이 밥 먹고 사는 존재로 엮인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분들과 찌개를 놓고 같이 밥을 먹을 때 우리는 혈맹보다 더 두터운 침맹의 관계를 맺었다는 농담을 하곤 한다. 침맹은 밥상을 놓고 나눈 우애여서 혈맹 못지않게 돈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족 구성원의 결속 역시 기존의 혈맹에 침맹이 더해져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같이 밥을 먹는 것이 일상적으로 지켜지지 않는 혈맹은 금이 갈 소지가 크다. 앞서 그려본 밥상 구조는 오랜 기간 유지되었던 우리의 가부장적 관습의 표상이다. 그것은 또 인간의 최소 공동체인 가족 간의 유대와 믿음을 유지하게 한 틀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틀마저 무너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언제인가부터 우리들의 아버지는 맨 윗자리에서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작아지고, 어깨가 움츠려든 우리들의 아버지를 많이 볼 수 있다. 심지어 가정에 들어가기 조치 힘들어하는 우리의 아버지. 한 가정의 질서와 참된 삶의 기본적 요소는 화목과 가족간의 신뢰다.
아무리 정신적 가치가 사라져 물질만능의 시대라지만 아버지가 차지하는 권위적 가치는 한 가정의 중심이다. 이 중심이 균형 잡히지 못하거나 흔들릴 때 우리의 가정은 붕괴되고 불안전한 사회구조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움츠러드는 아버지들이여 당당히 가슴을 펴고 지난 주역을 담당했던 아름다운 열정으로 앞으로의 세계를 열어가야 할 것이다.
마지막 남을 에너지에 불을 붙여 가장의 권위를 찾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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