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일논단] 가을을 타는 남자
[충일논단] 가을을 타는 남자
  • 서중권 편집이사
  • 승인 2012.11.0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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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은 처와 함께 설운산을 찾았다.
모처럼만에 둘이서 오붓한 산행을 즐겼다.
노랗게, 붉게, 파란 잎 새 사이로 형형색색 자태를 뽐내는 단풍풍경에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단풍잎은 왜 이리도 고운 자태로 나를 유혹할까.
옛 애인 생각이라도 절로 나는 시라도 중얼거려 볼까나.
봤을까?
날 알아봤을까?
유안진 시인의 ‘옛날 애인’이라는, 단 두 줄짜리 시다. 갓 스물 처녀 적 애인을 30년 세월의 어느 모퉁이에서 스쳤다. 행여 눈이 마주칠까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그러면서도 “아! 저 사람이 날 봤을까?” 가슴은 고동친다. 벌써 생각은 일직선으로 날아가 있다. 그 옛날 그 공원의 벤치로. 어떻게 손이라도 한 번 잡아볼까 어색하게 애쓰던 그의 몸짓과 숨소리가 지금 옆에 있는 듯 생생하다.
봤다면 날 알아보긴 했을까? 손이 얼굴로 올라간다. 여고를 막 졸업한 그때 그 싱그러운 얼굴은 어디로 가고 짜글짜글한 눈가, 결코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이가 알아봤으면 낭패다! 못 알아봤다면 서운하다. 알고서 지나쳤다면 서글프다.
그를 떠나보낸 건 가을이었다. 그날 이후 가을은 그녀에게 ‘아픔’으로 들어앉았다.
이별이 얼마나 아팠길래 노영심은 “아! 이별이 그리 쉬운가~”라고 노래했다. 최백호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라고 했었지. 그래. 이별, ‘떠남을 당하는 것’이란 가을이건 겨울이건 많이 아파!
이별은 떼어냄이다.
그렇게 단절된 두 개의 단면을 봉인하는 마감이기도 하다.
그건 어느 일방의 또는 쌍방이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끝을 맺는다는 속성을 지닌다. 마감의 강제성, 폭력성은 필연적으로 마음의 중허리가 잘리는 고통과 상처를 준다.
마감은 완력으로 수습하고 봉합함으로써 하나의 상황, 한 시대를 종결짓지만 그 닫힌 안쪽에서 새로운 힘을 잉태한다.
큰 생각이 자라고 여물고 숙성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자식을 매정하게 도회지로 유학 보내는 어머니의 배웅. 넘치는 사랑이 있음으로 해서 시골 역사의 그처럼 뜨겁고도 차가운 이별이 가능하다.
평화롭고 따스한 일상을 흔드는 떠남의 충격은 어린 마음에 트라우마가 된다. 동시에 인생의 자양분을 끌어올리는 대궁을 넓히고 튼실하게 한다.
이 가을에 우리도 한번 떠나보자. 인생의 중심이 아닌 것들을 털어버리고, 칠칠치 못한 내 삶의 방식, 헛것들을 갈바람에 날려버리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이즈음 한번쯤 큰 이별을 경험해야 한다. 미지근한 물에 데쳐지는 상황이 계속돼선 안 된다.
그냥 와글와글 떠들다 멋도 모르고 삶아지는 현실을 받아들일 순 없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혼란의 시기를 우리는 지나고 있다.
이 아픔을 겪고 나면 앞으로 나아가고 도약해야 한다. 지긋지긋한 이념도, 곡수 없는 싸움도 다 날려버리고 크게 이별하고 떠나자.
가을이 제법 깊숙이 진격해 들어오긴 했나 보다. 맷돌처럼 궤도를 앙버티며 시간만 갈아대는 남자들, 그 남자들 속마음까지 헛헛해지는 걸 보니. 변심한 애인처럼 은행잎은 왜 저리도 급하게 노래졌나?
아! 나도 가을을 타는 모양이다. 이왕이면 붉게 물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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