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일논단] 민의창달(民意暢達)과 격쟁(擊錚)
[충일논단] 민의창달(民意暢達)과 격쟁(擊錚)
  • 한내국 부국장 편집국 정치행정팀
  • 승인 2013.04.03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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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층민들의 민권의식을 깨우치는 통로가 된 도구가 바로 격쟁(擊錚)이다. 이는 조선시대에 힘없는 민초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때 이를 바로 알아 임금까지 보고하는 하의상달의 문화요, 권력이 곧 국민에 있다는 민위근본의 정신과도 맥을 같이 한다.
권력과 격쟁을 두고 그러나 같을 듯 하면서 너무 다른 괴리가 있어보이는 것은 왜일까.
박근혜 정부 들어 국정을 함께할 요직인 국무위원들을 선임하는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유례없는 낙마사태를 거치며 단적으로 드러난 인사난맥상을 두고 세간에선 ‘소통불능의 산물’이라고 지적했다.
위기라 일컫는 민생파탄지경에 이른 지금의 한국은 전근현대사를 통틀어 지금처럼 어려움이 큰 적이 없을 정도다. 혹자는 구제금융을 겪었던 98년의 국가부도 때보다 지금이 더 힘들다는 목소리도 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국가와 민족을 걱정하는 소위 인재를 발굴하는 일은 남은 5년과 앞으로 펼쳐질 미래한국을 위해서라도 그 중요성을 평가조차 하기 어렵다. 지금처럼 위기국면에서는 그만큼 인재의 발굴이 중요한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이 행해 온 단 하나의 제도조차 돌아보지 못하는 정권이라면 가히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대다수 국민들의 생각이다.
난세에 기둥하나로 세상을 떠받칠 수 없고 또 파탄의 세상에서 이를 구제할 구원투수가 한두사람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런만큼 더더욱 소통이야말로 이런 탁월한 인재를 발굴하는데 중요한 통로로 작용한다.
우리 조상들은 이같은 불통의 시대에 소통의 장치로 신문고와 격쟁 등의 제도를 과감하게 도입해 민의를 해결해 왔다.
신문고는 본래 하층민의 여론을 상달(上達)한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서울에 거주한 문무관원의 청원(請願)·상소(上訴)의 도구로 이용되어 일반 하층민과 지방민들에게는 별다른 효용을 갖지 못했으며 그나마 각종 제한이 많아 제대로 민의(民意)를 상달하는 기능도 하지 못했다.
또 조선 전기에는 수령권을 확립한다는 취지 아래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이 강력히 시행되는 등 하층민이 억울한 일이 있어도 그것을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 통로가 막혀 있었다. 이에 하층민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직접 호소할 수 있는 새로운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격쟁·상언(上言) 등을 등장시켰다. 격쟁의 처리는 형조(刑曹)에서 관장했다. 격쟁 사건이 일어나면 격쟁인이 일단 피의자로 간주되어 형조에서 체포하여 의례적으로 곤장 등을 친 다음, 그에게 억울한 내용을 구두로 진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격쟁인이 진술한 사실은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 빠짐없이 3일 이내에 국왕에게 전달되어야 했다. 신체적 고통이 따름에도 불구하고 구두로서 직접 억울한 일을 구체적으로 진술할 수 있고, 내용이 여과없이 국왕에게 전달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에, 문자를 모르는 하층민들은 글을 써서 아뢰야 하는 상언에 비해 격쟁을 더 선호했다.
이에 15세기 후반부터는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도 격쟁이 남발되는 것이 사회문제화 되었고, 격쟁인에 대한 처벌문제와 함께 격쟁을 할 수 있는 내용에 제한을 두었다. 구체적으로 형벌이 자신에게 미치는 일, 부자(父子) 관계를 밝히는 일, 적첩(嫡妾)을 가리는 일, 양천(良賤)을 가리는 일 등의 이른바 ‘사건사(四件事)’로 내용에 제한을 두었고, 만일 격쟁의 내용이 무고(誣告)로서 판명될 경우에는 격쟁인에게 곤장 80대를 가하는 처벌법규가 제정됐다.
이후 애민(愛民)정책을 적극적으로 내세운 정조대에 들어와 격쟁은 커다란 전기를 맞는다. 정조는 하층민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려고 대민접촉을 강화하는 한편, 즉위 직후 위외격쟁을 허용하였고 격쟁할 수 있는 사안의 내용도 이른바 ‘사건사’ 이외의 일반적인 고통까지로 넓혔다.
또 관리가 하층민의 격쟁 건수와 내용을 줄여서 보고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정조의 시책은 관료의 심한 반발을 받았으나, 그 내용이 하층민의 일반적인 애로사항으로 확대됨에 따라 종래의 ‘사건사’ 중심의 개인적이고 가문적인 차원을 벗어나, 점차 백성들이 현실 속에서 겪는 사회경제 전반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됐다.
이제 격쟁은 민의창달(民意暢達)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었고 동시에 하층민이 서서히 근대적 민권의식을 깨쳐가는 데 기여했다.
회남자(淮南子) 범론훈(氾論訓)에는 우(禹)임금의 통치자로서의 자질을 묘사한 대목이 있다.
우 임금은 자신에게 도(道)로써 가르칠 사람은 와서 북을 울리고, 의(義)로써 깨우치려는 자는 와서 종을 치며, 어떤 일을 고하고자 하는 자는 방울을 흔들고, 근심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와서 경쇠를 치며, 소송할 일이 있는 자는 와서 작은 북을 치도록 하라고 했다. 이에 우임금은 어진 사람들을 맞이 하기 위해 한 번 식사하는 동안에 열 번이나 일어났으며(一饋而十起), 한 번 머리 감을 때 세 번이나 머리를 움켜쥐고 나와 천하의 백성들을 위로했다. 이럴 때 선(善)을 다하거나 충(忠)을 나타내지 못한 자는 그 자질이 부족한 자라고 했다.
일이 몹시 바빠서 한 끼 밥을 먹는데도 도중에 여러차례 일어나야(一饋十起) 할 정도로 통치자가 국민들을 위한 정치에 각별한 열성(熱誠)이 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출범과정을 들여다 보면 통치자가 보여주고 있는 국민들을 위한 정치에 각별한 열성(熱誠)이 우리 선조들이나 가까운 중국의 그것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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