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복의 孝칼럼] 고독사(孤獨死)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객사(客死)
[최기복의 孝칼럼] 고독사(孤獨死)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객사(客死)
  • 최기복 충청효교육원장·성산 효대학원 교수
  • 승인 2013.11.28 19: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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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경력의 소유자가 떠돌이 삶을 살았다. 그녀는 말기암 판정을 받고도 의탁할 곳이 없었다. 그녀는 고독에 떨다 객사하였다.
추리 가능한 소설로 구성해 보자.
나는 일류 대학을 나온 재원이다. 외모가 출중하지는 않지만 나는 “못생겼다, 매력이 없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물론 듣는 데서야 누가 감히… 더구나 나는 영어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듣고 말하는 수준이 어지간해서 대학 졸업 후에 외무부에 특채되었고, 이때부터 나는 대학 동기들이나 주변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보낸 세월 속에서 나는 나의 일 만이 천직인양 매달려 살았다. 번역하고, 통역하고 출장가는 수준의 일이었다.
내 나이 40이 넘자 소위 치근대는 남자도 사귀자는 남자도 없어지기 시작했다. 조금은 다급한 심정이었지만 ‘인연이 닿으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여유를 찾곤 했다.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 얼마 후 어머니가 돌아 가셨다. 내 직장에서는 승진이라는 즐거움은 없다. 능력 있는 기능사원의 역할은 계속되었지만 나이가 50을 넘으면서 일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신규로 채용된 늘씬한 아가씨들은 내 처녀 때보다 훨씬 돋보였고 외국어의 소통 능력도 뛰어났다. 50대 중반에서는 히어링(듣기)기능이 떨어지면서 나는 직장을 그만 두었다. 부지불식간에 나는 고아가 되었다. 무료한 나날 속에서 나는 외국어판 신문을 들고 양지 녘이면 아무데나 눌러 앉아 신문 읽는 것이 유일한 취미가 되기 시작했다.
처녀로 늙는 것도 직업이 없는 것도 안타깝다는 생각보다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책을 하기 시작하면서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고민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나눌만한 곳도 없다. 가을 하늘이 유달리 높아 보이는 날 나는 노인들이 많이 모인다는 종로 쪽 공원에를 가보았다. 누군가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라도 있기를 은근히 기다렸지만 접근해 오는 영감도 없다. ‘초라한 행색이 싫어서 도수 높은 안경에 고급 머플러를 두르고 간 것이 잘못인가’라는 생각으로 다음날은 일부러 초라한 행색으로 나가봤다. 오늘도 허탕이다. 모여서 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자식자랑, 며느리자랑이다. 과거 잘 나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침을 뛰기며 언성을 높이지만 피시식 웃음이 나온다. ‘설마 혼자 사는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나?’라는 생각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하고는 살지만 불안하다. 불안이 가중될수록 산다는 일이 두려워 진다. 이렇게 살 바에야 내가 왜 살아야 하는가? 고민이 엄습해 오면 나는 조울증 환자처럼 실눈을 뜨고 앞을 봐도 보이지 않기 시작한다. 잠시 스쳐갔던 사내 모습이라도 만날까 해서 다른 공원에 나가봤다. 허탕이다. 거울 앞에서 봤다. 내가 사내라도 구애는커녕 쳐다보지도 않을 얼굴이다. 머리는 부스스 한 백발에 굵게 팬 주름 특히 입주름은 매력 없는 마술 할망구 같다.
언제부터인가 몸 전체가 통증으로 흔들리기 시작해 병원에 갔다. 보험가입을 묻는 간호사에게 고개를 흔들자 나의 행색을 다시 훑는다. 정밀 검사를 해보라고 한다. 연고를 묻는 의사에게 혼자라고 했다. 입맛을 다시며 그래도 누군가를 데려오라고 한다. 나는 생애를 반추해 봤다. 여기에 나랑 함께 와줄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기억의 필름은 멈춰 선재 돌아갈 생각을 안 한다. 줄곧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고민의 명제 속에 숨 쉬고 있었지.
누구도 죽는다. 깨끗한 보료 위에서 혹은 병원 침대 위해서 온가족의 전송을 받으며 유언을 받아 적을 변호사가 동석 한 자리다. 이렇게 맞는 죽음은 돌아가신 것이다. 술 처먹고 제 몸 가누지 못해 아무데나 누워 잠들다 깨어나지 않는 죽음은 돼진 것이다. 나처럼 고독에 떨다 죽을 곳조차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 죽는 죽음은 고독사일까? 객사일까?
나는 죽을 데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젊었을 때 시집을 가서 자식을 낳고 그들과 어울려 살 수 있는 기회가 분명 있었다. 스스로 선택의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 죄다. 졸린다. 어금니가 마주치는 말기암의 통증은 진통제 가지고도 제어가 불가하다. 내죽음은 결국 객사로 치부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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