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까? 듣기를 원하는 대답은 무엇인가?
필자는 최근 세종시 일원의 중학생을 상대로 효와 인성 교육의 특강을 하고 다녔다.
중학교 1학년 학생에게 왜 학교에 다니느냐고 물었다.
얼버무리며 대답을 못하는 학생이 대답을 하는 학생보다 훨씬 많았다.
정작 학교에 다니면서 왜 학교에 다니는지를 대답하지 못한다.
다시 묻는다. 장차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
한 반에 16명에서 25명 내외의 학생들 중 4~5명이 대답을 한다. 다양한 대답이지만 구체성이 없다.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학생에게 왜 변호사가 되고 싶은가를 물었다. 우물쭈물한다. 반의 반장이라고 한다.
교문에는 꿈과 끼의 학교라고 현수막이 펄럭 거린다.
왜 학교에 다니는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지식이란 무엇인가?
지식이란 지혜를 얻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머리 속에 욕심만 가득 넣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1등을 위한 혈투의 장소가 학교라면 학교는 없는 것만 못하다.
차라리 회초리로 종아리를 걷게 하고 행동의 옳고 그름을 바로 가르치는 서당만도 못한 학교,
훈장의 정신은 찾아 볼수 없는 선생님들에게서 지혜교육이 있을 수 있을까?
심지어 효와 인성 교육시간에 중요한 영어 수학이 빠지면 학부모에게 전화가 온단다. 그것이 두려운 교장선생님.
이렇게 자란 젊은이들에게서 삶에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겠나? 이들이 국가건설(Nation Building)에 대한 사명감(Mission Mind) 가질 수 있겠나?부모세대가 겪은 가난과 고난에서 얻은 가치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겠나?
권리와 의무의 한계를 구별할 수 있겠나?
조폭의 수괴가 되고 싶다는 학생에게 묻는다.
왜?
법보다 주먹으로 정의를 실현하고 싶단다.
법이 경시되는 나라가 대한민국인가? 어떻게. 왜. 여기까지 오게 되었나를 생각하며 실소를 머금는다.
가정교육은 부모 탓, 학교 교육은 선생 탓, 사회교육은 어른 탓이다.
이 시대 어른이 된 것이 너무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