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복의 孝칼럼] 효 윤리의 생명이 위태로운 일본
[최기복의 孝칼럼] 효 윤리의 생명이 위태로운 일본
  • 최기복 충청효교육원장·성산 효대학원 교수
  • 승인 2014.09.18 0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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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의 근세사속에는 일제침략에 의해 짓밟혔던 수탈의 역사사가 숨쉬고 있다. 아직도 정신대 문제와 한일간 공방이 끝나지 않은 영토 분쟁과 역사 왜곡은 미완의 숙제들이다. 국민 개인은 기장 정직한 민족이 일본인이요, 남을 불편하게 하는 것을 제일의 금기사항으로 여기는 일본사람들이다. 허나 정치적 리더들은 왜 역사를 부정하고 독일정부처럼 홀로 코스트를 인정하지 못할까?
그리고 왜 식자들은 강한 부정으로 역사 바로 인식 하기를 꺼려 하는 것인가?
그들의 생존이란 지진과 해일과의 싸움이었다. 그들의 시각으로 바다건너 반도를 지나 커다란 대륙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었다. 자연과의 싸움보다 가나안에는 민족의 복락이 있으리라는 망상속에 싸움을 획책했던 자들이 전쟁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천황을 굴지의 신으로 모시면서 신앞에 맹종이라는 선택을 영광으로 오인하게 하는 정신적 세뇌를 획책했던 것이다. 일본의 신은 예수도 석가도 공자도 아니었다. 남묘 호랭교 등 잡다한 신을 모시는 잡교가 판을 치는 연유이기도 하다.
일본인들의 가미가제 정신(자폭)은 천황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이었고 할복은 천황의 지엄한 분부를 거역했다고 하는 자들이 스스로 배를 갈라 목숨을 바치는 충성의 보루 행위 같은 것이었다. 2차대전에서 유행했던 일본군대와 독일 병정이라는 표현은 그들의 비인간적 모습을 극명하게 표현했던 낱말 들이었다. 그들은 핵무기의 위력 앞에 항복의 두손을 들었다. 다시 절치부심 세계 1위, 2위를 다투는 부자 나라 대열에 진입하였고 이제 다시 군국주의 부활을 꿈꾼다. 작금의 군국주의란 영토와 국민을 외세의 침공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화적인 분쟁해결을 위한 쓰임새 있는 도구는 더더욱 아니다.
이해관계를 합리적이거나 객관적인 탁상에서의 결정에 평화적으로 순응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력으로 승부하려는 저급한 깡패 수준의 사고를 기조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죄없는 자들도 깡패를 만날까 두려워한다. 있는 것 다 빼앗기고도 목숨을 구걸한다. 빼앗은 자들의 먹이사슬은 빼앗긴 자들의 피땀으로 이룬것들이다. 왜 저들은 2차대전의 아픔을 타산지석으로 삼지 못할까? 결국 악순환의 고리는 인류 멸망의 고리가 된다는 점을 모르는 것일까? 인간이 영혼을 가진 동물이라는것. 인간역시 길들이기 나름이라는것을 정녕 모르는 것일까? 차세대에게 물려줄 구원의 일본 정신은 침략이라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인이 존경하고 믿고 따르는 나라가 일본이라는것을 일본에서 태어난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효 윤리의 근간은 상대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상대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부조리와 모순을 지양해야 한다. 때로는 나와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지 다름을 나쁜것으로 치부하는것은 아니어 야 한다.
일본의 충(忠)문화가 효(孝)문화와 접목하지 못하는데서 찾은것이 군국주의 문화로의 회귀라면 일본의 효 윤리는 생명이 위태로운것이다. 개인주의와 국가 전체주의의 균형을 충효 문화라고 한다면 일본은 짝퉁 문화만 존재하는 나라다. 충(忠)문화의 일방적 전제인 애국의 강요가 나라사랑은 아니라는 것이요. 아직도 근친상간의 과거속에 살고 있는 일본 천황가문이 한국의 전통적 가족사랑인 효(孝)의 모습과는 별개다. 충효 문화는 하모니(harm oney)다. 일본의 효윤리가 정착되지 못하는 이유는 역사를 바로 보려 하지 않는 막가파 극우 정치세력의 역사관이다. 이들의 역사관과 철학이 바로 서지 않는 한 효 윤리의 생명은 위태로워 질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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