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중 칼럼] 가난의 대물림과 부(富)의 세습
[김강중 칼럼] 가난의 대물림과 부(富)의 세습
  • 김강중 선임기자
  • 승인 2015.11.17 18: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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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시철이다.
입시와 취업시즌이면 계층 상승을 위한 젊은이들의 고군분투가 안쓰럽다.
30년 전 대학은 자유, 진리, 학문 연구의 기치로 거창했다. 당시 사회의 민주화와 빛과 소금 역할을 해냈다.
이제는 허울이 됐고 단순히 영악한 이기주의, 취업의 수단쯤으로 전락한 느낌이다.
사회 출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목숨 건 입시전쟁, 취업전쟁에 매달리니 눈물겹고 애처롭다.
개인의 노력은 가상하지만 ‘부익부 빈익빈’ 구조적인 문제로 계층상승의 기회는 멀어지고 있어 안타까움이 앞선다.
속담에 ‘개천에서 용(龍)난다’는 말이 있다. 이제는 왕조시대처럼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고려시대 최충헌의 사노 만적은 노비 해방을 위해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오늘날 온갖 노력을 다해도 계층상승을 기대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다는 현실을 개탄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대학입시만 해도 그렇다. 부모의 정보력과 재력이 합격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
지난해 서울대 자체분석 결과 서울대 합격생 가운데 서초, 송파 등 강남3구 출신이 강북구 학생보다 무려 21배가 많다고 한다.
강남구 인구는 강북구 인구의 2배가 되지 않는다. 부모의 소득과 정보력이 자녀의 학력까지 결정짓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부모의 능력이 아이들 미래에 미치는 영향이 적어야만 그게 정상이다. 부와 가난이 대물림되고 반복된다면 이 나라의 미래는 없다.
그렇지만 강남·북 지역 부모의 능력은 자녀들에게 출발점이 다른 게임을 물려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로스쿨 만해도 그렇다. 로스쿨 도입으로 사법시험이 2017년 폐지될 예정이다. 게다가 외무고시도 폐지하고 외교 아카데미를 바꾼 것 또한 석연치 않다.
이런 변혁 속에 정점을 찍은 우리 경제는 저성장으로의 조짐이다. 경제성장의 가도를 달릴 때도 ‘파이’를 나누기보다 부의 편중을 심화시켰다. 세습형 부자, 대물림 빈곤으로 양극화 사회로 점차 변모되는 추세다.
예전에는 집안이 어려워도 오직 공부만으로 판사, 변호사 등 사회적으로 선망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었다.
부산상고 출신으로 인권변호사, 국회의원을 거쳐 대통령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이제 이 같은 사회구조는 점점 요원해지고 교묘히 개혁이란 미명으로 개악이 되고 있는 현실이다.
기업을 공개만 해도 수조 원, 수천억을 챙기는 재벌 2, 3세들이 넘쳐나고 있다. 반면 월급쟁이들은 연말에 정산을 할 때도 유리지갑이 털리고 있어 불만이 크다.
이뿐이 아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 차이도 우리 사회의 갈등을  키우고 있다.
이런 불공정한 게임은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대전 지역에서 파장을 낳은 사립고 시험성적 조작의혹 사건도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현재 경찰의 수사와 교육청의 감사가 진행되고 있다.
문제가 불거지자 이 학교 이사장은 제보교사에게 더 이상의 확산을 만류했다. 그러자 고발자는 이사장 아들의 교사채용 당시 시험성적 조작마저 폭로하겠다며 협박했다고 한다. 그러자 이사장은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애원했다는 후문이다. 신성한 학교에서 시정잡배 보다 못한 행태는 충격 그 자체다.
꼭 1년 전 대전도시공사 채용과정에서 고위 임원의 자녀가 높은 면접점수로 입사해 파문을 낳았다. 논란이 일자 해당 임원은 퇴임하는 것으로 봉합했다.
1차 서류전형, 2차 필기시험에 통과해도 3차 심층면접에서 ‘빽’에 밀려 고배를 마셨다는 지원자들을 종종 접하게 된다.
이들은 자신의 부족함 보다 주변의 청탁으로 자신이 피해를 입었지만 알 길이 없고 엇갈린 인생길은 걷고 있다. 이 처럼 자식을 위해 남의 일자리를 빼앗는 부정(父情)의 부정(不正)은 이들만이 아니다.
한 대학병원의 고위 임원도 마찬가지다. 취업을 못하고 있는 여식을 위해 같은 계통의 종사자 고위 임원에게 취업을 청탁하는 것을 자연스런 일로 여기는 세상이 됐다.
본사를 대전에 두고 있는 공사는 가관이다. 공기업인데도 부자 간, 조카와 삼촌, 매제와 처남, 동서 등 인척들이 한 직장에서 몸을 담아 사기업을 방불케 하고 있다.
이런 혈연과 인맥만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소위 ‘빽’과 ‘돈’의 위력은 여전하다.
지난 토요일 고교 친구 30여 명과 정겨운 등산모임을 가졌다. 계란 두 판이 목전인 터여서 퇴직해서 소일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손가락 드는 한 친구는 투자를 하면서 몇 차례 실패를 했다. 그는 40년간 경쟁에서 승자도 아니었다. 다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많은 친구였다.
유산으로 잘 버텨 온 친구는 내년 봄 아들의 혼일을 잡았다고 했다. 유학을 보냈고 결혼까지 시키면서 10억 원이 넘는 아파트를 사주겠다고 했다.
집이 없는 신혼들은 10년, 20년을 허비를 할 것이다. 삶의 출발점은 결혼에서도 큰 차이가 나겠다 싶었다. 숲속 길을 걸으며 염상섭의 ‘삼대’가 떠올랐다.
백년 전이나 오늘이나 가족, 계층 간 갈등의 구원은 역시 돈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처럼 부(富)의 축적은 신분의 계층을 넘어 점차 계급의 사회로 변질되고 있다.
이런 사회가 희망은 있는 것일까. 가을비에 사락사락 낙엽이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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