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安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天安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 김헌규 기자
  • 승인 2015.11.22 18: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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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이양 대감묘를 벌초하고 있는 천안향토회 김종식 연구원.
▲운초 김부용 묘
▲ 한시대의 세도가였던 봉조하 김이양의 묘는 수풀이 무성하고 관리가 안돼 문인석과 비문은 사라진지 오래다.(사진)

천안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천안흥타령의 태생지이자 능수버들이 휘영청 늘어진 천안삼거리공원, 유관순, 석오 이동녕, 유석 조병옥박사등 애국열사들과 임진왜란 때 진주성전투를 승리로 이끈 충무공 김시민장군, 실학자이자 천체문리학의 대가인 담헌 홍대용선생과 같은 훌륭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곳 이기도하다.
이렇게 훌륭한 인물 뒤에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잊혀진 인물과 역사가 있다. 본지에서는 기획연재를 통해 이를 재 조명코자한다.

[인물재조명 기획 1] 운초 김부용

-김이양 대감과 운초 김부용, 나이를 초월 ‘운명적 사랑’
-육조판서 두루 지낸 대표 선비 운초와 50년 나이차 넘은 교감
-묘 돌보는 이 없어 잡초만 무성 문인석·비석도 사라진 지 오래

 

천재 여류시인 운초 김부용을 이야기하려면 봉조하 김이양 대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김이양은 (1755∼1845, 영조 31∼헌종 11) 천안 광덕에서 태어나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명여(命汝), 할아버지는 시술(時述)이고 아버지는 한성판윤을 지낸 헌행(憲行)이다.
어머니는 헌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윤지술(尹志述)의 딸이다.
초명은 이영(履永)이었으나 예종과 이름이 비슷해 피휘(避諱: 임금의 이름을 피함)하기 위해 이양이라 개명할 것을 청해 왕의 허락을 받았다.
김이양의 부인은 이명상의 딸인 완산(完山)이씨며 아들을 두지 못해 이고(履枯 김이양의 동생)의 아들인 한순(漢淳)을 양자로 들였다.
한순은 대근과 현근의 두 아들을 두었고, 현근은 순조의 딸인 명온공주(明溫公主)와 혼인해 동녕위에 봉해졌다고 김이양문집에 전해져온다.
이제 본격적으로 운초 김부용에 대해 재 조명해 본다. 그동안 야사엔 김이양이 평안감사로 있을 때 기생이었던 운초를 만났다고 전해온다.
하지만, 천안문화연구실 김성열 실장은 “김이양은 1826년 관직에 얽매이지 않고 강호를 유람하다 운초 김부용을 만난 것으로 성천시기에 정사로 전해져온다.”고 밝혔다.

◆강호 유람 운초 김부용 만나
김이양은 40세 때인 1795년(정조 19년) 생원으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며, 1812년(순조 12) 함경도관찰사로 있으면서 그 지방의 기강확립에 힘쓰는 한편 고장주민들의 민생고 해결에 노력했다.
또한, 이듬해에는 계문(啓文: 왕에게 드리는 형식을 갖춘 글)를 올려 변경지방 군사제도의 불합리성을 지적해 시정토록 건의하는 한편 어염선세(漁鹽船稅)와 둔전세(屯田稅) 및 마필(馬匹)의 헌납을 감면해 주도록 주청해 허락을 받았다.
이어 함경도의 진환곡(賑還穀)을 확보키 위해 영남 포항창(嶺南浦項倉)의 곡식 3만석을 이급(移給: 옮겨서 지급함)토록 주청해 2만 3000석을 얻는 데 성공하는 등 치적을 남겼다.
1815년 차대(次對: 임금의 요청에 의한 임금과의 대좌)에서는 함경감사 때의 경험을 들어 국경지방 군사제도 개선을 주장하고 허락을 받았다.
같은 해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내고 이듬해 호조판서가 돼 토지측량의 실시와 세제 및 군제의 개혁, 화폐제도의 개선을 강력히 주장했다.
1819년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이 됐고, 이듬해 판의금부사를 거쳐 좌참찬에 올랐다. 1844년(헌종 10)에는 만 90세가 되어 궤장이 하사됐으며, 그 이듬해 봉조하(奉朝賀)로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후 중추부영사에 추증됐다.
옛날 서울 남산 아래 수석이 아름답고 경관이 빼어난 곳에 녹천정(綠泉亭)이 자리잡고 있었다.
연천(淵泉) 김이양(金履陽)이 순조가 하사한 땅에 거대한 저택을 짓고 그 뒤에 정자를 세웠는데, 초록 이끼가 낀 맑은 샘을 바라본다 하여 녹천정이라 이름하였다.
연천은 평양감사로 부임하던 시절에 성천(成川) 기생으로 가무와 시문에 뛰어난 부용(芙蓉)의 재능을 인정해 운초(雲楚)라는 별호를 내리고 가까이했다.
이후 연천은 운초를 데리고 서울로 돌아와 소실로 맞이하고 남산 아래 녹천정에서 연회를 베풀고 시문을 짓는 등 즐거운 생을 함께한다.
천안문화역사연구실 김성열 실장은 “운초는 비록 김이양의 정부인은 아니었고, 나이차이 또한 많았지만 강호자연을 좋아하고 풍류를 즐겼던 사람이었다.”며 “운초는 나이를 떠나 김이양을 좋아하고 존경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강호자연, 풍류를 즐겼던 사람
운초가 김이양을 만난 것은 생애에 중요한 전기가 됐으며, 기녀생활의 종지부를 찍은 것도 그렇지만 50년이라는 나이 차이를 초월한 한 남자와의 사랑은 운초의 시(詩) 세계에도 큰 영향과 변화를 주었다.
1843년 2월 김이양은 사마회갑(司馬回甲 과거급제 후 60년이 되는 해에 조상들의 성묘를 위해 고향인 천안 광덕사 경내에 있는 자신의 장원(莊園)에 부용과 함께 순행한다.
김이양은 고향 광덕을 다녀온 이듬해인 1884년 10월에 감기로 향년 9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김이양은 광덕사 뒷산 자좌오향(子坐午向)에 위치하고 있으나 자손들이 돌보지 않아 수풀이 무성하고 문인석과 비문은 사라진지 오래며, 제단엔 누구인지는 몰라도 ‘김이양 봉조하묘’라고 흰색 페인트 글씨로 써놓았다.
이에, 김종식연구사는 “한 시대를 주름잡던 세도가의 묘역은 찾는 이 없어 잡초만 무성한데 한 여류시인인 김부용의 묘는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며 “권세보다는 문학이 더 긴 세월을 이어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봉조하 김이양대감과 나이를 초월한 사랑을 나눈 운초 김부용(1800-1857)은 평안도 성천 출신의 기녀로 호는 부용(芙蓉), 또는 추수(秋水) 추낭이다. 양반인 선고(先考)는 당호가 추당(秋堂)인데 일찍 죽었다.
중부(仲父)밑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태어나고 죽은 연대는 정확히 알수없으며. 초당마마라고도 불렸다.
작품으로는 억가형(憶家兄) 오강루소집(五江樓小集) 대황강노인(待黃岡老人) 등이 전해지고 있다.
송도의 황진이(黃眞伊)와 부안의 이매창(李梅窓)과 함께 조선시대 3대 詩妓(시기)로 불리 운다.
평양감사 김이양과 시(詩)로 서로를 사모하다 소실이 되어 남산자락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낭군을 사모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후 1970년대에 작가 정비석선생이 조선일보에 명기열전을 연재하면서 밝혀진 인물이다.
유언에 의해 남편이 묻힌 광덕산 오름 한곳 외진 곳에 묻혀있다.
정작 남편이던 봉조하 김이양 대감의 추상 갖던 권력과 명예는 잊혀져 아는 이가 없으나, 시를 좋아 하던 기생의 묘소는 지역 문인들에 의해 진달래가 만발한 계절이면 발길이 이어지고, 매년 5월경이면 추모제를 열어 그녀의 시상을 흠모하고 있다.
하지만, 운초 김부용 묘는 확실한 고증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도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아 아쉬움을 더하고 있다.
이에 김종식 연구사는 “그동안 부용을 추모하며 매년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며 “조속히 묘역이 문화재로 지정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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