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재 조명하다-기획21] 천안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금석문 재 조명하다-기획21] 천안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상당부원군 한명회 신도비 5편-끝-”
  • 김헌규 기자
  • 승인 2016.12.11 16: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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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末年)에 자준(自濬)은 성남에 정자를 짓고 압구정이라고, 이름 하여 노령을 이유로 벼슬을 그만 두려고 하였다.
임금은 두 차례나 근대식 절구 시(絶句 詩)를 지어주었다.
방의 네 벽에 경서(書)로 차있고 압구정의 간판이 더욱 광채가 났다.
대신들이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시문을 지은 이가 무려 60여 명이나 되었으며 중국의 선배들도 시문을 지은 이가 많았었다.
그러나 임금의 돌보아 줌이 날이 갈수록 깊어서 결국 벼슬을 그만 두려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공이 총애를 받을수록 위험을 생각하여 끝가지 안전하게 지위를 보유함은 오랜 옛날을 더듬어 보아도 그만한 사람이 없다.
아! 아! 거룩하도다. 공의 부인은 여흥부 부인 민씨(驪興府夫人 閔氏)요, 증 우의정 대생(贈 右議政 大生)의 딸로 1남을 낳았다. 이름 보 무과참좌리공신 봉랑서군(名 堡 武科參佐理功臣 封琅城君)이다.
딸은 첫째가 봉례 신주(奉禮申澍), 둘째가 영천군 윤반(鈴川君 尹潘), 셋째가 장순왕후(章順王后)로 공릉(恭陵)에 모시고, 넷째가 공혜왕후(恭惠王后)로 순릉(純陵)에 모셔있다. 다 일찍이 사망하였다.
공의 둘째부인은 7남 6녀를 낳았다. 낭성군(琅城君)의 부인은 좌참관 이훈(左參贊 李塤 之女)의 딸로 3남 2녀를 낳았다.
첫째는 경기(景琦), 딸은 이광(李光), 기타는 아직 어리다. 봉례(奉禮)는 3남을 낳았다.
신종흡(申從洽)은 군기 첨정(軍器僉正)이고, 신종옥은 호조 정랑(申從沃 戶曹正郞이며, 신종호는 홍문관 직제학(申從濩 弘文館直提學)이다. 영천군(鈴川君)은 2남 5녀를 낳았다.
 윤수강, 윤수륜(尹秀崗 尹秀倫), 딸은 홍의손(洪義孫), 이수량(李守諒), 문미수(文眉壽), 양숙(梁淑), 공릉(恭陵)은 인성대군(仁城大君)을 낳았다.
1488년 이조 성종 19년 무신년, 정월 11일 병오 일에, 공의 묘를 청주 장명리(현재 천안시 수신면 장명리) 북쪽에 앉아 남쪽을 향한 곳에 모셨는데,(壬坐丙向) 장사를 마친 뒤 낭성군(琅城君)이 공의 사적을 기록한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비명(碑銘)을 비어달라고 하였다.
아! 아! 내가 공의 비명을 쓰려하니 감개가 무량하다. 나는 15세가 못되어서부터 태재 유방선(泰齋 柳方善)선생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공과 길창군이(吉昌君) 뒤에 와서 우리는 동문수학(同門受學)하였다. 같이 있으면서 공부한지 수년 동안 공은 나를 늙어서 사귀는 젊은 벗으로 보았다.
오행으로 나는 먼저 급제(及第)를 하고 공과 길창군(吉昌君)은 오래도록 뜻을 펴지 못하였는데, 두 분이 같이 공신 1등의 훈공(勳功)을 세우는데 승리하여, 3공의 지위에 오르자 나는 정력이 모자라고 떨치지 못하여, 공이 밀어준 덕택으로 오늘에 까지 이르렀다. 길창군은 벌써 죽고 말년(末年)까지 친구로서 다만 공과 나뿐 이였는데, 공은 늘 자기의 뒷일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이제 산이 무너지고 들보가 부러진 듯 우러러 볼 데가 없구나! 공이 일생에 쌓은 훈공과 덕을 대강 적어 비명(碑銘)을 짓고 이어 눈물을 흘렸다. 아 아 슬프다!

명(銘)에 이르길

천지의 기운을 모으고 산하의 기운모아 세상을 구원하고 나라를 경륜할 재주와 도량을 갖추고 나왔다.

한때 때를 못 만나서 진시대의 사안같이(晋 謝安)동산에 높이 누워 세상을 멀리하려뜻을 세웠지마는 때가 오고 운이 트여

굽혔다가 다시 폈다 남양초단 와룡선생세조만나 천재 기우 정책세고 대업도와탱천관일(天貫日) 밝은 충성 금수강산 이 나라에

밝은 훈공 밝은 충렬 널따란 삼공부(三公府)며높다란 공신누각 나가면 장군이요 들어오면 재상이다 나라에 주춧돌로

안위(安危)를 책임지고 휴척(休戚)을 같이 하여 70고개 넘어섰다. 그지없는 행복수복 그 덕행은 성시대의 문언박(文彦博)과 백중(白仲)이오

그 위력은 당시대의 곽자의(郭子儀)와 한결같아 어이하여 별안간에 이 귀감을 앗아갔나! 앗아갔다 하지마는 덕과 공이 남아있다.

썩지 않는 덕과 공은 충성이며 근면이다 무엇으로 그 미덕을 후세에 들어내니! 빛나는 역사상에 그 광채가 황황하다

저 서원을 바라보라 이것이 공의 현당(玄堂) 하늘이 복을 주어 자손이 창성하리니 믿지 않는 사람이란 나의 글을 읽어보라

1488년 성종 19년 (명나라 홍치 원년) 무신년 5월 5일 세움.<청주 한씨 대동보 6효정묘 1993년. 청주한씨 세덕사 1975년. 청주한씨 사감 1976년. 청주한씨문헌록. 김종식 정리>[충남일보 김헌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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