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周易)으로 본 세상] 상생과 소통의 지혜와 ‘규괘’
[주역(周易)으로 본 세상] 상생과 소통의 지혜와 ‘규괘’
  • 김재홍 충남대학교 교수
  • 승인 2016.12.13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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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는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권력을 비판하고 새 변화의 계기를 마련한 한 해였다. 민주적인 열망을 담은 시민들의 촛불시위로 마무리하는 세밑이다.
촛불시위는 우리 사회의 부패로 인한 갈등과 대립이 표출되면서 성숙한 민주적인 시민의식은 새 변화의 계기와 희망을 보았다. 그동안 우리는 각 분야에서 개인과 집단의 이익을 앞세워 그 목적에 맞으면 정의가 됐고 반하면 불의라는 이기심과 흑백논리에 매몰돼 극한 대립의 연속이었다. 모두를 지치게 만들었던 소모적인 논쟁에서 새 변화를 모색하는 계기의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이제 이런 변화를 이끌어 나갈 새로운 리더십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세종대왕은 임금이 되고나서 장자승계를 고집하면서 세종의 등극을 적극 반대했던 황희를 영의정에 제수했다. 영의정에 오른 황희의 비판과 견제 속에서 초심을 잃지 않으려는 세종대왕의 리더십과 지혜가 한없이 그리운 때이다.
주역의 ‘화택규괘’는 상괘인 이괘(離卦)는 불로서 위로 타오르고, 하괘인 태괘(兌卦)는 물로서 아래로 흐른다. 즉 서로 가는 길이 다름을 나타내고 있는 상(象)이다. ‘규’는 어긋날 ‘규’자로서 물과 물이 서로 어긋남을 의미한다. ‘규괘’는 대립과 갈등을 넘어서서 상생과 소통의 모색을 설명하고 있는 괘(卦)이다.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은 끝내고(終), 새 삶의 방식으로 전환(始)하기 위한 모색과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는 ‘화택규괘’를 두고 남녀가 서로 다르니(異) 탐색이(同) 필요하듯 서로 다름으로(異) 대립과 갈등이 유발되나 같음을 찾아서(同)으로 화합을 도모하라고 말한다. 
서로 어긋날 때는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순서이다.
‘규’는 서로 어긋남으로 이럴 때에는 먼저, 자신을 성찰하는 공부가 되어야지 길하다고 한다. 반면 자신의 성찰과 반성도 없이 큰일에 나서는 것은 서로가 인색해져서 화를 자초하게 된다고 한다. 규는 개인 차원에서는 결단이 필요한 경우이다. 즉 사물은 서로 어긋나지만 화합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반성과 함께 순리대로 하면 화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같으면서도 다르고(同而異), 다르면서도 같다(異而同).  
천지의 형상은 다르지만 서로의 작용하여 만물을 만들어 내는 것은 같으며, 남과 여가 서로 어긋나되, 그 구하고자 하는 뜻은 통한다. 그리고 만물이 만 가지로 생김새와 성질은 다르되 천지로부터 생성되어서 품부(稟賦)받은 음양의 기운은 같다는 것이다. 이 같이 겉은 달라보이되, 실제 같은 것이 천지의 이치이므로, 어긋날 때에도 그 근본은 통하고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의 어떤 대립과 갈등도 해소될 수 있는 갈등과 대립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같으면서도 다르고(同而異), 다르면서도 같다는(異而同) ‘규괘’의 이치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악인일수록 거절하거나 피하지만 말고, 관용과 포용력으로 교화해라
‘규괘’에서는 말(馬)을 잃어버려도 절대로 짜증내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말은 내버려두면 회귀의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에 비유한 것이다. ‘성인지도’를 잃고, 소인지도, 기득권, 각종의 미련 등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언젠가는 말이 집으로 돌아오듯이 인간의 본성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인을 보면 조심하고 경계하라고 한다. 굳이 대립각을 세울 필요가 없다. 관용과 포용으로 대하고, 혐오와 분노를 피하면서 삼가 하면 악인을 만나 보아도 허물이 없다. 즉 악인일수록 거절하거나 피하지만 말고, 관용과 포용으로 교화하는 것이 재앙과 허물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세상사가 모두 어긋나 있어도 갈팡질팡하지 마라. 믿음과 정성으로 하면 허물이 없다.
‘규괘’에서는 소인지도에 빠져서 마음을 못 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 앞에서 갈 길을 가로막고, 뒤에서 끌어당기고 있어서 목적한 곳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이것은 세상사가 모두가 어긋나 있어서 갈팡질팡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사 모두가 어긋나 있지만 정도를 잃지 않으면 반드시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성인지도’에 대한 주체적인 자각으로 내 마음 속에서 성인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천도를 자각하면 하늘이 도와 이롭지 아니함이 없다.
‘규괘’에서는 모든 일이 어긋나지만 중도(中道)에 대한 자각과 믿음으로 해쳐나갈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은 천도의 자각을 통해서 모든 일이 해결되어 상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공자는 하늘로부터 도움이 있어 길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다고 말한다.
성인의 말씀으로 천하의 모든 의심이 해소된다.
성인의 말씀에 대한 의심을 풀자마자 하늘에서 비를 만나 만물이 번성하게 됨으로 길하게 됨을 말한다. 비를 만나는 자는 사람이요, 비는 내려준 것은 하늘이다. 즉 ‘천인합덕’을 말한다. 성인지도를 자각하게 됨으로 마침내는 이제까지 품었던 의심이 풀려서 서로 정으로 화합하게 된다. 그래서 길한 것이다. 즉 성인의 말씀에 대한 모든 의심이 해소되며, 천하의 의심되는 바가 풀리게 되어 상생이 이뤄진다고 한다.
‘규괘’는 대립과 갈등을 넘어서서 상생과 소통의 모색이다. 즉 새로운 방식으로 전환하기 위한 모색과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갈등을 딛고 넘어서서 상생과 소통을 모색하는 원칙으로 같으면서도 다르고(同而異), 다르면서도 같다는(異而同)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규괘’는 인간사의 어긋남부터 성인 ‘군자지도’의 어긋남까지 다르지만 같음(異而同)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이 규괘의 이치이다. 다름(異)은 같음(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즉 동을 전제로 이의 해결책을 모색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이는 결국 하나가 되어 대립과 갈등을 딛고 넘어서 상생과 소통의 세상을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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