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재 조명하다-기획22] 천안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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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사부 곽시징 묘비문”
  • 김헌규 기자
  • 승인 2016.12.18 16: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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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시징의 묘.

조선 영조임금이 어린 영잉군시절 사부였던 곽시징의 묘는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관성리 웅동에 있다. 이 묘소는 처음엔 공주에 모셨다가 후손에 의해 고향인 이곳으로 옮겨왔다.
곽시징의 묘비문을 소개하면
경한재(景寒齋) 곽(郭) 공이 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 두 분 선생의 문하에 있으면서 예의를 익히고 의리를 지켜 학자(學者)들의 미목(眉目)이 되었는데, 유독 공은 남모르게 스스로 수양하며 세상에 드러내기를 바라지 않았다. 만년(晩年)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 성상(聖上, 영조(英祖))이 잠저(潛邸)에 계실 때 가르쳐 제왕의 성품을 발하게 하고 모든 안목을 열리도록 하는데 의뢰하게 한 것도 오히려 공로가 있는데, 더구나 성덕(聖德)을 열게 하여 태평의 기반이 되도록 한 것이겠는가? 공의 학문이 활용을 다하는 데는 이르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군자는 오히려 활용하였다고 여겼다.

공의 휘(諱)는 시징(始徵)이고, 자(字)는 경숙(敬叔)인데, 뒤에 지숙(智叔)으로 고쳤다. 곽씨(郭氏)는 시중(侍中)인 곽상(郭祥)에서 드러나 청주(淸州)를 관향으로 삼았으며, 본조에 들어와서 곽추(郭樞)는 고려조의 옛 신하로 찬성(贊成)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공의 고조 휘 회영(懷英)에 이르러 시정(寺正)으로 승지(承旨)에 추증되었으며, 휘 설(說)을 낳았는데 첨정(僉正)으로 최종 직질은 가선 대부(嘉善大夫)이고, 휘 희태(希泰)를 낳았는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판서(判書)에 추증되었으며, 고(考) 휘 지흠(之欽)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이니, 4세(四世)가 모두 문보(文譜)에 올라 청백(淸白)과 문한(文翰)으로 일컬어졌다.
비(?)는 창녕 성씨(昌寧成氏)인데 선교랑(宣敎郞) 성준웅(成俊雄)의 딸이며, 계비(繼?)는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도사(都事) 김옥(金?)의 딸인데, 공은 김씨의 소생이다.
어려서 매우 영민하여 잘 깨달았으며 장자(長者)가 아는 바를 물으면 대답하는 말이 이미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여섯 살 때에 집의공(執義公)을 따라 평산(平山)의 관아에 있었는데, 마침 청(淸)나라 사신이 평산부를 지나가면서 매우 으시대므로, 차원(差員) 이기남(李箕男)이 이례(吏隷)에게 화풀이하며 장차 뭇 사람들 앞에서 때려죽이려고 하므로 공이 그 뭇 사람들에게 중지하도록 하면서 말하기를,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니, 모여서 구경하지 마시오.”하자, 이기남이 부끄러워하면서 감탄하여 말하기를, “어린아이가 벌써 인애(仁愛)를 잘 아니, 뒷날 큰 선비가 될 것이다.”하였다.
≪소학(小學)≫을 읽고는 개연(慨然)히 모든 일을 그대로 따라 행하려 하였으며, 또 과거 공부는 뜻을 빼앗는다고 하면서 한 차례 나아가 응시하였다가 문득 사절해 버렸다. 이미 두 분 선생을 따라 배우면서 더욱 학문의 길과 맥을 알고 부지런히 힘쓰며 연구하고 생각하느라 심지어 몸이 야위는 데까지 이르렀으므로 집안사람들이 권유하여 그치게 하였으나 오히려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다.
선생을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배우기를 청하며 간혹 밥을 먹거나 잠을 자는 일까지 잊으므로 우암(尤菴, 송시열의 호)이 매번 그의 학문 좋아함을 칭찬하였고, 참봉[齋郞]으로 추천하여 임명되었지만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년)에 화(禍)를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우암에게 사약[後命]이 내리자 여러 문인들과 함께 소(疏)를 올려 원통함을 호소하였는데, 소를 올리도록 논의한 것은 바로 공이 앞장섰던 것이다. 태안(泰安) 지역으로 물러가 살면서 출입을 끊고 학문을 닦으니, 따르기를 원하는 학자(學子)들이 다투어 집을 짓고 배우기를 청하므로 공이 한결같이 율곡(栗谷)이 이룩해 놓은 법을 따라 가르쳤는데, 바닷가에 있는 후미진 지역에 비로소 학문이 있음을 알게 하였고 사나운 풍속이 따라서 교화되는 것이 많았다.
갑술년(甲戌年, 1694년 숙종 20년)에 목천(木川)의 옛 거처로 돌아와 도(道)를 강론하는 여가에 수석(水石) 좋은 데를 거닐며 도산(陶山)과 석담(石潭)의 제가(諸歌)에 화답하는 감흥시(感興詩)를 지어 읊고 노래 부르면서 스스로 여유 있는 생활을 하였다. 계미년(癸未年, 1703년 숙종 29년)에 목릉 참봉[穆陵郎]에 임명되었으며, 또 왕자 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다가 별제(別提)로 승진하였으며, 외직으로 나가 이인도 찰방(利仁道察訪)이 되었다.
사부였을 때에 지금의 주상(영조(英祖))이 연잉군(延?君)으로 잠저에 있었는데, 가르치려 나아갔을 때 예조에서 강학(講學)하는 의절(儀節)을 빠뜨렸으므로, 숙종께서 처음에 공에게 찬정(撰定)하도록 명하였다가 조금 지나서 또 빈주례(賓主禮)를 명하자, 공이 좋아하지 않으며 고집하기를, “사부이면서 빈주의 의식이 가하겠습니까?”하였다. 마침내 찬정한 것이 임금에게 알려지자 숙종이 가하게 여겨 법으로 정하도록 명하였는데, 주상께서 그때 바야흐로 어렸었는지라, 공이 기필코 글 뜻을 되풀이하면서 상세하고 널리 비유하여 설명하였으며, 또 ‘효도하고 우애하며 공손하고 검소함[孝友恭儉]’을 학문하는 큰 근본으로 삼는다고 손수 써서 올렸다.
그 뒤에 이인도 찰방으로 있을 때에 주상의 사서(賜書)로 인하여 또 네 글자로써 거듭 힘쓰게 하면서 ≪소학≫을 익숙하게 읽고 겸해서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보도록 청하였으므로, 임금이 마음을 기울여 공경하고 신임하여 즐겁게 묻기를 관직에서 떠났다고 하여 거르지 않았으며, 지방으로 옮겨감을 듣고는 역시 전송을 베풀어 떠나도록 하였고, 심지어 병환이 났을 때 근심하고 상사(喪事)에 부의(賻儀)를 보내어 은혜로 대우하기를 쇠퇴하게 하지 않았었다. 지금 주상의 덕기(德器)가 비록 타고나신 바일지라도 근원에 물을 대고 깊게 한 것은 또한 공에게서 힘을 얻은 것이 많았기에, 그 쌓은 정성과 권면하고 인도한 것은 실제로 사부들 가운데서 제일이라고 하였다.
공의 품성이 이미 어질고 후덕하며 학문은 실천을 주장으로 삼았고, 일찍이 스스로 가르침을 따라 잠시라도 게을리 하지 않고서 겸양하고 공손함을 회양(誨養)하여 스스로 잘난 체 뽐내는 것을 병으로 여겼으며, 돈독하고 확실함을 굳게 지켜 나약하고 광채 나는 것을 폐단으로 여겨 일을 절제하기를 반드시 공경으로 하고 자신의 몸가짐은 반드시 근신하여, 아무리 이익과 손해가 번갈아 변하여도 본래의 뜻을 바꾸지 아니하였고 병이 들어 사사로이 있을 때에도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마음을 다스리기를 진실로 이미 엄밀하게 하였으므로 확정된 힘 또한 스스로 드러나 징험되었다.
일찍이 객사[逆旅]에서 옆 사람에게 벼락이 쳤을 때와 도적이 밤에 침실을 범(犯)하였을 때 좌우가 두려워 엎드렸는데, 무용(武勇)이 없으면서도 홀로 안존하게 태연 자약하였다. 부모를 섬김에는 아침 문안과 잠자리 보살피기를 예(禮)대로 하였고 맏형 섬기기를 어버이 섬기듯 하였으며, 어버이가 병이 들자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먹이기도 하고 변[糞]을 맛보기도 하였고 상(喪)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염락(鹽酪)이 없이 죽을 먹었으며, 비록 상을 마쳤어도 묘소를 지날 적이면 반드시 울부짖곤 하였다.
장공예1)(張公藝)의 고사(故事)를 모방하여 ‘곽씨백세동거도(郭氏百世同居圖)’를 만들어 미루어 행하려고 하였으며, 찰방[馬丞]이 되어서는 효도와 공경으로 부로(父老)를 권면하고 달래어 상벌의 우선으로 삼았고, 친구와 교제하는 데는 반드시 성심(誠心)을 다하였었는데, 그 낭패하기를 윤증(尹拯)처럼 한 이에게도 타이르고 책망하다가 고치지 않은 뒤에야 절교하였지만, 악한 말은 하지 않았다.
가장 예가(禮家)의 공부에 뜻을 두어 약관(弱冠) 때에 의례서(疑禮書)를 읽으며 먼저 문목(問目)을 보고는 책을 덮고 깊이 생각하여 자신의 견해를 징험하였으며, 연마하고 비교 궁리하기를 머리가 세어도 나태하지 않았으며, 의심나는 글과 바뀐 의절(儀節)은 세밀하게 긁어내어 분석하고는 그 이룬 학설에 나타내어 분변하기를 정밀하게 하고 근거하기를 상세히 하는 데는 비록 옛날의 전문가라도 미치지 못하였다.
만년에 공주(公州)의 둔촌(遯村)에 집을 지어 살았으며, 임종 때에 부녀를 물리치고 시중드는 자가 정침(正寢)의 병풍을 거꾸로 설치한 것을 꾸짖으며 자리를 바르게 하고 세상을 떠나니, 실로 계사년(癸巳年, 1713년 숙종 39년) 4월이었으며, 향년이 70세다.
처음에 공주에 장사지냈다가 목천(木川)의 선영 아래 곤향(坤向)의 산록으로 개장(改葬)하였다. 원배(原配)는 연안 이씨(延安李氏)로 현감(縣監) 이필(李?)의 딸인데 3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곽재적(郭載績)ㆍ곽성적(郭成績)ㆍ곽하적(郭夏績)이고, 딸은 신협(申?)에게 출가하였다.
다시 통덕랑(通德郞) 청송(靑松) 심익형(沈益亨)의 딸에게 장가들어 3녀를 낳았는데, 생원(生員) 김철근(金鐵根), 현감 박필언(朴弼彦), 사인(士人) 이현우(李顯祐)에게 각각 출가하였으며, 측실(側室)의 아들은 곽치적(郭治績)이고, 딸은 이명상(李命相)에게 출가하였다.
곽재적의 아들은 생원 곽원진(郭元鎭)과 곽유진(郭維鎭)ㆍ곽보진(郭普鎭)ㆍ곽여진(郭與鎭)이고, 딸은 이단상(李端常)ㆍ한준수(韓浚遂)에게 출가하였으며, 곽성적의 아들은 곽진일(郭鎭一)ㆍ곽진구(郭鎭九)ㆍ곽진만(郭鎭萬)ㆍ곽진억(郭鎭億)이고, 딸은 안종신(安宗臣)에게 출가하였다. 곽하적의 아들은 곽진표(郭鎭杓)이고, 김철근의 아들은 김득호(金得好)ㆍ김득추(金得秋)이며, 고유진의 아들은 고태제(高泰濟)이고 그 나머지 손자와 증손 남녀는 모두 어리다.
곽유진이 징군(徵君) 한원진(韓元震)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비명(碑銘)을 부탁하였다. 옛날 한윤명(韓胤明) 공이 학문을 성취하지 못하고 일찍 몰(歿)하자, 특별히 선조(宣祖)의 잠저 때 사부(師傅)라고 하여 율곡이 그가 졸(卒)한 것을 일기에다 매우 상세히 썼는데, 더구나 공의 학문과 행의(行義)는 더욱 세상에 영원히 전해지도록 함이 마땅하니, 훌륭한 사가(史家)로 율곡의 뜻을 아는 자가 있어 과연 능히 끌어다 잇대어 써서 없어지지 않도록 할 것인가? 불녕(不?)이 우선 이를 기록하여 기다리노니, 어떤 자의 병을 고치고 그림을 그리는 증거가 여기에 있을진저.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그의 예론은 문채가 나며 그의 공경은 엄연하기도 하네. 지조를 지킴이 견고하고 문로(門路)는 바르기도 하네. 공의 스승은 누구더냐 유씨(游氏)에게 이정(二程) 격이며2), 누가 공을 스승으로 삼았던가? 감반(甘盤)이 무정(武丁)에게와 같네3). 구이(九二)와 구오(九五)는 임금의 덕[龍德]이니 모두 대인(大人)이도다. 이미 배우고 또 가르치는 일 현인이 아니고 누가 낫겠는가? 학문은 많이 듣는 데 달렸으니 공에게 묵묵히 줌이 있도다. 온화하고 단정한 군자여 나의 명이 부끄럽지 않도다.
[자료제공]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청주곽씨 대동보 김종식 소장,곽노욱 목천종중,곽창신 웅동종중[충남일보 김헌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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