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내국 칼럼] 전쟁사를 보면 역사가 보인다
[한내국 칼럼] 전쟁사를 보면 역사가 보인다
  • 한내국 편집국 부국장
  • 승인 2017.06.29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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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67주년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첫 미국방문에서 첫 일정으로 한국전쟁 참전용사가 있는 묘역을 찾아 참배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으로 불리우는 6.25전쟁은 2차세계대전 이후 전세계가 참여했던 가장 큰 전쟁이다. 한국을 돕기 위해 나선 유엔군이 45개국에 이르고 이중 직접 전투에 참가한 나라만 해도 16개국에 이른다.

이들이 한국전쟁 참전결정을 한 이유는 이데올로기의 영향이 컸다. 2차세계대전 직후 전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주의 이념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사회주의 이념이 충돌했다. 이런 영향으로 전 세계가 이데올로기 경쟁이 가속화 됐으며 한국전의 참전은 이런 체제선택의 한 방향으로 작용했다.
해마다 우리는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정해 순국선열의 고귀한 뜻을 기려오고 있다. 그러나 많은 국민들은 한국전쟁에 참여한 이들에 대한 구체적 행적을 기억하지 못한다.

특히나 해외참전용사 하면 이들 16개국가들의 용사들만 기억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자 재외한국인(동포)들의 전쟁참가가 적지 않았음도 기억해야 한다.
1950년 6·25가 터지자 일본에 거주하던 동포 장정들이 “나라 없는 설움과 고통을 또다시 겪을 수 없다”며 제 몸의 안전과 창창한 미래를 내던진 채 사지로 뛰어들었다. 대학생을 주축으로 한 재일의용군 1진 69명이 미군 수송선 피닉스호를 타고 1950년 9월 13일 요코하마를 출항해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것을 시작으로 모두 642명이 참전했다.

출정식 현장을 취재하다가 입대를 결심한 신세계신문 기자 김성욱, 조카 조만철과 함께 자원한 조용갑, 막 소년티를 벗은 18세의 김교인과 조승배, 45세의 중년 병사 김순룡, 각각 병원과 자동차회사라는 안정된 직장을 포기한 강대윤과 조종규 등 가슴 뭉클한 사연도 많았다.
처음엔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 이들의 참전을 불허했다가 동포들이 총사령부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이고 탄원서를 보내는 등 결연한 출전 의지를 보이자 수용했다고 한다.

1952년 9월 29일 미국 CBS 방송의 조지 하먼 도쿄지국장은 재일의용군의 활약상을 보도하며 이들을 ‘유령부대’라고 불렀다. 재일동포들이 미군에 배속돼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것을 한국 특파원들이 확인했는데도 도쿄의 유엔군사령부가 이들의 존재를 부인하자 유령이라고 칭한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군번도 없이 ‘일본에서 온 병사’(S.V. FROM JAPAN)라고 적힌 견장을 단 채 용감하게 싸웠다. 중국군 참전으로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유엔군이 재일의용군들을 철수 대상에 넣자 이들 중 상당수가 귀환을 거부하고 한국군 배속을 강력하게 요청해 국군의 계급과 군번을 부여받기도 했다.

재일의용군 가운데 전사자는 52명이었고 83명이 행방불명됐다. 생존자들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265명은 미군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나머지 242명은 일본이 무단출국자로 규정해 입국을 불허하는 바람에 이산의 고통과 생계 곤란을 겪었다.
전사자들은 국립서울현충원 제16 묘역에 묻혀 있다. 이들이 처음 전공을 세웠던 인천의 수봉공원에는 1979년 10월 1일 참전기념비가 세워졌으며, 첫 전투에 참가한 9월 하순에 맞춰 해마다 기념식이 열린다.
일제강점기를 거치자 마자 이데올로기의 희생이 된 한국은 그러나 전후 눈부신 발전을 통해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반토막 난 국토의 나머지 절반을 이데올로기의 노예로 뺏긴 후 67년이 지났다.

같은 민족이 두 개로 나뉜 채 목숨을 건 대립을 해오는 비극이 현재 진형형이다.
한국전쟁을 기반으로 지금껏 강력한 우방으로 자리한 미국. 그들을 가리켜 ‘혈맹’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하지만 냉엄한 국제질서는 약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법이다. 빼앗긴 민족에게 관용은 없는 것이 현실이고 역사다.
미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첫 일정으로 28일 오후(현지시간) 버지니아주 콴티코 미 해병대 국립박물관에 있는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찾아 참전용사들과 함께 헌화하고 산사나무를 심었다.

세계전쟁사에서 가장 인도주의적인 전쟁으로 기록된 전투가 장진호 전투에 이은 흥남철수다. 압록강까지 탈환한 국군과 유엔군은 중국군의 개입으로 북한 지역이 다시 공산화될 위기에 처하자 문 대통령의 부모는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했다.
흥남철수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훗날 ‘전쟁사에서 유례없는 사상 최대의 인도주의 작전’으로 불린 흥남철수 작전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장진호 전투’였다.
흥남철수 당시 미군이 제공한 선박을 통해 약 9만1000명의 피란민이 흥남에서 남쪽으로 철수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는 거제로 도착했고 2년 뒤 문 대통령이 태어났다.

인류역사는 곧 전쟁의 기록이나 다름없다. 그런 관점에서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중이다. 휴전상태인 한국을 보는 한국인들이 냉엄한 전쟁사를 통해 현실을 직시하고 바른 정신을 굳건하게 유지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6월을 보내는 지금 이것이 이순간 우리가 왜 이들을 되돌아보는가 하는 이유다.[충남일보 한내국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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