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중 칼럼] 언론 적폐에 관한 소고(小考)
[김강중 칼럼] 언론 적폐에 관한 소고(小考)
  • 김강중 선임기자
  • 승인 2017.09.12 16:45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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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2년 전, ‘부끄럽고 희망 없는 대한민국’이라 제하의 칼럼을 쓴 적이 있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으나 희망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작금의 국내외 정세가 구한말만큼 위태로우니 더욱 그렇다.
촛불정권이 탄생했으나 정치는 퇴행의 길을 걷고 있다. 경제, 사회, 안보 등 전반에 걸쳐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무엇이 이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그것은 정치세력이든 개인이든 대의를 버리고 모리(謀利)에 매달린 결과가 아닐까.

언론 또한 여기에 자유로울 수 없는 종범이다. 곧 검찰수사가 예상되는 MB 정권의 녹색성장이 그랬다. 또 박근혜 정부의 실체 없는 창조경제를 방관한 점도 가볍지 않다.
더 지켜 볼 일이지만 현 정부도 위기의 정세, 경제 불황으로 험난함을 예고하고 있다.
조급함일까, 정권이 들어 선 초기라 해도 일 처리가 매끄럽지 못하고 허둥대는 모습이다. 
문제투성이 장관을 임명하고 공무원 늘리기 등 선심성 정책에 우려의 소리가 크다. 또 ‘을’들에게 전가한 최저시급 인상, 졸속 탈(脫)원전 정책, 사드배치 논란도 또한 그러하다.

여기에 가공할 북한의 수소탄 핵실험, 계란 살충제 파문, 발암물질 생리대, 집값 상승 등 불안이 가중되고 있다.
전조 증상일까. ‘김정은도 무서워한다’는 중학생들의 도(度)를 넘은 폭력은 우리 사회의 기강마저 흔들고 있다.
그런데도 정권을 빼앗겨 분함을 삭이지 못하는 어느 야당은 혼동을 부추기고 있다.
보루가 돼야 할 언론 또한 기회만 살피고 있는 듯하다. 마치 하이에나가 사냥감을 노리듯 시간을 벌고 있는 느낌이다.

어찌됐든 언론개혁이란 신호탄이 쏘아졌다. 공중파 2개사는 언론적폐 청산을 외치며 공동파업에 들어갔다.
이들은 부역언론인 퇴진과 공정 보도를 위한 편집권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정권마다 반복되는 일이어서 그리 새삼스럽지도 않다.
돌아보면 박근혜 정부도 야당의 반대를 위한 반대에 부딪혀 허우적대다 국정농단의 파국을 맞았다.
부메랑이 된 것인가. 오늘의 여당도 전 정권 형세와 같다. 철없는 어느 정당은 성찰 없이 분풀이에 열심이다.

정치권이 이랬듯 언론도 권력 부침에 따라 부화뇌동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중앙, 지방언론 막론하고 레임덕에 접어들면 더욱 그랬다.
‘정언(正言)’을 말하지만 언제나 번드레한 수사(修辭)에 그쳤다. 지역민을 대변하기보다 시류와 기관에 타협하며 교언으로 영색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대전지역의 기관과 언론도 이런 낡은 관행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방지의 소임은 중앙지와 차별화된 현안을 환기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지역 실상은 어떠할까. 지방권력은 홍보의 기여도, 영향력에 따라 신문사 등급을 분류하고 광고와 이권을 나눠준다.

신문사는 광고료로 연명하다보니 인사와 사업발주 등의 비리를 눈 감고 홍보기사만 전달하게 된다. 사세(社勢 )신장을 들어 엿과 바꾸는 것이다.
근간 언론사와 기자들이 양산돼 이런 현상은 심화되고 광고를 구걸하는 영업사원으로 넘쳐 난다.
이를 간파한 기관은 광고를 내세워 부정과 일탈을 맞바꾸면서 상생을 제의한다.  
물어야 움직이는 게 공무원의 생리다. 이를 터득한 언론은 ‘조지고 째고’ 윽박지르며 광고를 요구한다.

일례로 어느 여고생의 죽음을 두고 학교나 관련기관은 성적을 비관한 단순 실족사로 처리했다. 외동딸을 잃은 아버지는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교사와 학생들의 증언도 어떤 폭력에 의한 타살이란 의문을 제기했다. 이런 진실을 밝히고자 취재가 진행되면 관계기관은 협조를 운운하며 기자를 광고로 회유를 한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얼버무리면 죽음의 진실은 묻히게 된다. 그런 뒤 세월이 흐르면 유사한 사건은 반복되게 마련이다.

흔히 기자를 엽욕(獵慾)의 사냥개에 비유한다. 출입처를 감시, 비판하는 감시견(워치도그), 공격견(어택도그)이 되란 말이다.
이제는 언감생심이 됐다. 1인 미디어 시대라 누구나 기자가 되는 세상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것이 언론만은 아닐 것이다. ‘기레기’로 폄하되는 남루한 직업이 됐다.
이런 수수로움에 영화 ‘택시 운전사’를 관람했다. 내내 주인공 ‘김사복’만도 못한 기자는 아닌지 자문했다.

초년병 시절, 선배들은 ‘기자는 세상과 때로는 자신과도 타협하지 않는다’고 일깨워 줬다.
허물없는 기자가 되려했지만 자괴감이 크다. 며칠 전 술자리에서 이런 심경을 비추니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을 탓하고 남을 고치려 들지마, 자신의 마음을 바꾸면 그만이야’라고 다독였다. 하지만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평생 걸리는 그 ‘마음’을 어찌 하겠는가.[충남일보 김강중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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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일 2017-09-12 21:32:36
현정부의 과오와 현 사회 전 분야의 냉철한 비판에 속이 시원하네요 특히 요즈음조작이란 드라마가 연상되세요 선임기사님도 드라마를 보시나요
과거의 잘못됨을 대승적 측면에서 용서하는 미덕이 필요함 다음 칼럼은 정치적
용서와 화해란 제목으로^^~ 늘 좋은글에 감사합니다

2017-09-14 00:28:58
레토릭만 난무하는 웃기는 세상에 솔직한 실질을 추구하는 귀하의 글들은 우리에겐 축복이요 당신에겐 천형입니다
아무도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