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주 칼럼] 신이 계시다면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양형주 칼럼] 신이 계시다면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 양형주 목사 대전 도안교회
  • 승인 2017.11.1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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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에 고난이 지나갈 때 신앙의 유무를 떠나 누구나 본능적으로 던지는 질문이다. 이 문제를 놓고 고민은 하지만 사실 뾰족한 답을 찾기란 참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질문 자체를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신선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예전에 성 어거스틴은 이 질문을 정 반대로 비틀어 물었던 적이 있다.

“신이 계시지 않다면 세상에는 왜 이리도 여전히 선한 것들이 많이 있는가?”

생각해 보라. 세상에는 악이 많고 또 이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이 많이 있지만, 여전히 그 중에도 사랑과 소망과 믿음이 있고 서로를 위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렇다면 이 악과 고통이 만연한 세상에서도 우리로 소망 중에 다시 살아나게 하는 이 모든 선한 것들은 어디서 왔는가? 결국 “신이 있다면 세상에는 왜 이리 고통이 많을까?”라는 질문과 “신이 계시지 않다면 세상에 왜 이리 선이 많을까?”라는 질문은 동일한 질문의 양면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악과 고난을 경험하면서 “신이 있다면 왜 이리 악과 고난이 많은가?”로 문제를 제기하지만, 동시에 악과 고난 중에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선과 위로와 아름다운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도대체 이 수많은 선과 아름다움은 어디서 온 것일까?
악의 문제가 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한다면, 선의 문제는 신을 긍정하게 만든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세상의 악과 고통의 문제로 신을 의심할 때 이 질문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고난의 깊은 심연에 찾아온 신의 임재를 찾아야 한다.
구약성서에 이해할 수 없는 갑작스런 큰 고난을 당한 인물의 대표로 욥이 등장한다.

욥은 하루아침에 자녀들을 다 잃고, 모든 재산을 잃었으며,  몸에도 종기가 나서 사람을 만날 수 조차 없게 되었다. 이러한 욥의 고난을 옆에서 지켜보던 그의 아내는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2:9)고 저주하고는 도망간다. 하지만 욥은 극심한 고난 속에 찾아온 신의 임재를 경험하고 거기서 고난을 이겨내는 신비로운 힘과 용기를 얻는다. 
여기에 고난의 신비가 있다. 고난은 욥의 아내와 같은 외부인이 볼 때는 신의 부재를 입증하는 치명적인 재앙의 시작이지만, 욥과 같은 고난의 당사자에게는 신의 임재를 긍정하는 새로운 통로가 된다.

우리 주변도 잘 보라. 고통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신을 거부하려는 주장들을 보면, 많은 경우가 고통과 직접적으로 상관없는 주변인에게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정말 고통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 기회를 통해 신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만약 우리가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신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그에게 정직하고 용기 있게 달려갈 수 있다면, 우리는 고난가운데 임재하는 신비롭고 역설적인 신의 현존을 경험할 것이다.[양형주 목사 대전 도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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