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현 칼럼] “수능 연기(延期)는 혼란이 아닙니다. 안전입니다”
[김창현 칼럼] “수능 연기(延期)는 혼란이 아닙니다. 안전입니다”
  • 김창현 서울대학교 지리학 박사
  • 승인 2017.11.20 17: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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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침대는 과학입니다”라는 광고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이 광고의 파장은 뜻밖에 엄청났다. 초등학생들이 “다음 중 가구가 아닌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시험문제에 정답 “세탁기”가 아닌, “침대”를 고른다는 것이다. 이 광고가 초등학교 학생들의 가구 개념에 혼란을 준다고 교육청에 항의가 빗발쳤다고 한다.
논리적으로 보자면,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는 거짓이다. 때문에 일부 초등학생이 개념적으로 오류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장은 다음 문장을 위한 양념일 뿐이다. “침대는 과학입니다”라는 문장은 “우리 회사 침대는 과학적으로 잘 만들어졌습니다”를 말해주는 은유법이다.

화자는 “침대는 과학”이라고 말함으로써 이 문장이 과학적 진술이 아니라 허풍임을 스스로 내보이고 있다. 즉, 첫 문장은 논리적으로 거짓이되, 맥락상 상대를 속이기 위한 거짓말은 아니며, 허풍이다.
침대는 과학이니까 가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초등학생이 있었을까? 아마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가구가 아닌 것을 고르라는 시험문제를 틀린 학생도 있었을 수 있다. 덕분에 선생님은 이 문제를 채점하면서 “침대가 과학”이라는 문장은 ‘은유법’이라고 이야기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문장은 앉은 자리에서 수 없이 만들어낼 수 있다. “밥이 보약이다”와 “잠이 보약이다”라고 누군가 말했다고 해서 보약의 개념에 혼돈을 주었다 탓하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에 시비를 거는 사람을 본 적은 없다.

그렇다면 왜 “침대는 가구가 아니다”하는 광고카피는 화제가 되었을까? 우리 아이의 시험점수와 연결될 수 있다는 공포 때문이다. 우리 아이가 잘못될 카피로 인해 시험문제를 하나 더 틀릴 수 있다는 불안감. 어쩌면 이 사건 본질은 우리가 얼마나 시험점수 앞에서 팍팍하게 사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영화 ‘곡성’에서 나오는 귀신 들린 여자아이라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뭣이 중헌디! 시험문제 하나 틀릴 수도 있지, 그것이 뭣이 중헌디!” 시험은 틀리기 위해서 보는 것이다. 동시에 시험은 남과의 경쟁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늠해주기 때문에 서열의 도구로도 사용된다. 그리고 그 서열은 언젠가 인생의 서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불안하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은 좀 달라졌을까? 포항에서 일어난 지진 때문에 수능이 일주일 연기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일부 철 없는 네티즌들은 여진의 불안에 떨고 있는 특정지역 주민에게 “너희 때문에 수능이 미뤄졌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또 언론사들은 너도나도 수능점수 발표일정과 수시일정이 연기될 수 밖에 없다고 보도한다. 그리고 종종 “당혹감”과 “혼란”이라는 표현도 태연하게 등장한다. 그렇게 태연하게 등장하는 그 표현은 “그깟 일 때문에 수능을 미뤘냐”는 핀잔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이미 알려져 있듯 2014년 세월호가 침몰할 당시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해경 실무진에게 VIP에게 보고할 동영상 자료를 요구했다고 한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경악했다. 모든 사람들이 아이들의 목숨이 동영상보다 중요하다는 것쯤은 알기 때문에 더욱 분노했다. 
그런 의미에서 언론이 이번 수능연기를 보도할 때는 좀 더 신중한 단어 선택을 했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관성적으로 “당혹감”과 “혼란”이라는 표현을 남발한 덕분에 수능이 미뤄지면 정말 큰 일이 나는 것 같은 진짜 “혼란”이 생기기 때문이다.
수능 연기를 대통령이 빠르게 결정하고, 여야 의원들 모두 공감한다니 다행이다. 혼란 뒤에 안전이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안전을 선택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수능 연기는 혼란이 아니다. 안전이다.[충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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