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현 칼럼] 철학, 카메라 앞에서 말하라!
[김창현 칼럼] 철학, 카메라 앞에서 말하라!
  • 김창현 서울대학교 지리학 박사
  • 승인 2018.01.01 17: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99년, EBS에서 도올 김용옥의 ‘노자와 21세기’ 강의가 전국을 휩쓸었던 것을 기억하는가? 머리 빡빡 깎은 괴짜 철학자의 등장에 전국은 그야말로 노자 열풍으로 들끓었다.
‘노자와 21세기’ 교재인 김용옥의 저서뿐만 아니라 김용옥을 비판하는 책마저 베스트셀러가 되던 시기였다. 덕분에 한국인은 도덕경(道德經)에 상선약수(上善若水: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이외에도 다른 좋은 말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1세기가 되자, 노자가 아닌 철학자 강신주가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강신주는 이 시대에 ‘철학자’를 자처하는 몇 되지 않는 캐릭터로서 한 때 유명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힐링캠프’에 나올 정도로 스타 학자였다.

그의 저서, <철학이 필요한 시간>은 삼성경제연구소의 추천도서로 선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5만 권 이상의 놀라운 판매량을 기록했다. 90년대를 기억하는 사람에게 5만 권은 감흥이 없는 숫자일지 모르겠지만, 하루 평균 6분 책을 읽는다는 한국인들의 생활양식을 떠올려보면, 5만권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이다.
2008년에는 느닷없이,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이 불었다. 잘 생긴 하버드 대학교의 젊은 교수, 마이클 센델은 ‘한국이 사랑하는’ 정치철학자가 되었다.
그의 저서에는 정치철학사의 수많은 논쟁이 흥미로운 이야기와 함께 소개되어 있다. 이전 칼럼에서도 소개한 적 있는 뚱뚱한 사람과 전차의 딜레마도 그 중 하나이다. 고장 난 전차의 방향을 틀어 죽을 지도 모르는 3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뚱뚱한 사람 1명을 희생시키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벤담, 밀, 그리고 칸트의 입장 차이를 이끌어내는 센델의 솜씨는 일품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의 인기 비결은 다른데 있었다. 그의 책보다 먼저 인기를 끌었던 것은 그의 강의 동영상이었다. 수백 명의 하버드 학생을 앉혀놓고 문답식수업을 통해 매끄럽게 수업을 진행하는 그의 솜씨는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어쩌면 책의 인기는 동영상 인기의 후광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식인이 자신의 저작을 마케팅하는 수단으로서 영상매체를 이용하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TV나 유튜브를 통해서 철학을 접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불통(不通)이 되기 쉽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예를 들면, 김용옥 책 몇 권 읽고 “동양 철학이 서양 철학보다 훨씬 깊고 풍부하지”라는 식의 논평을 늘어놓는다거나, 강신주의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서 소개한 철학자의 몇 가지 인용구를 통해서 그 학자에 대해서 ‘좀 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향. 철학 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불통이 강화되는 역설도 무시하기 어렵다.
80년대 운동권들은 헤겔과 마르크스를 모르는 사람을 무식한 사람 취급했다고 한다. 90년대에는 갑자기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등이 번역되어 나오기 시작하면서, 푸코를 모르면 어디 가서 지식인인 척 말라는 흉흉한 말이 떠돌기도 했다. 2000년대에는 라캉, 데리다 번역서가 줄줄이 나오면서 그야말로 철학의 춘추전국시대를 이루는 듯 했다.

그리나 2000년대 이후의 서점가는 확실히 TV와 유튜브 스타들이 장악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가장 걸 맞는 대작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조차도 그의 학문적 성취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유튜브를 통해서였다.
20세기 이전의 학문이 다른 사람이 다다르지 못했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경쟁이었다면, 21세기의 학문은 각종 매체를 동원해 사람의 마음을 훔치기 위한 경쟁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둘 중 어느 하나만 바람직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세상이 바뀌고 있고, 바뀌는 세상에서 학문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대학원에서는 ‘카메라 앞에서 말을 잘하는 방법’을 필수과목으로 가르치면 어떨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