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현 칼럼] 한국GM이 떠나가면 군산은 어떻게 될까?
[김창현 칼럼] 한국GM이 떠나가면 군산은 어떻게 될까?
김창현 서울대학교 지리학 박사
  • 충남일보
  • 승인 2018.02.1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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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항과 함께 대표적인 개항장 중 하나였던 군산은 일본의 쌀 수출(을 빙자한 수탈)을 위한 계획도시였다. 군산 개발을 위해 많은 일본인이 군산에 둥지를 틀었고, 많은 한국 노동자들은 처음으로 임금노동을 경험했다. 그 흔적은 이제 고스란히 스토리가 되어 장소의 지층 속에 스며들어 있다.

군산은 그 고즈넉한 풍경과 역사성으로 인해 영화 촬영지로서도 인기가 많다. ‘타짜’(2006)에서 고니(조승우 분)의 스승이었던 편경장(백윤식 분)의 이른바 ‘히로쓰 가옥’, ‘8월의 크리스마스’(1998)의 촬영지인 ‘초원사진관’ 등 군산은 영화의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참고로 ‘초원사진관’은 전시관이다. 사진을 찍으려면 다른 사진관을 찾아가야 한다).

지금은 기차가 다니지 않지만, 군산 경암동의 철길마을은 어떻게 사진을 찍어도 예술작품이 나오는 곳이다. 믿거나 말거나, 전국의 3대 짬뽕집 중 하나라는 ‘복성루’는 짬뽕을 먹기 위한 사람들로 항상 인산인해다.
대전에 ‘성심당’이 있다면, 군산에는 ‘이성당’이 있다. 이성당은 손님들이 기다리는 건물을 따로 둘 정도로 붐비는 군산의 대표 빵집이다.

최근, 군산의 소식은 우울하다. 군산공장의 자동차 생산라인은 실적부진으로 중단되었다. 한국GM은 조만간 한국을 떠날지도 모른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문제는 한국GM이 군산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다는 점이다. 군산의 인구는 27만에 불과하다. 한국GM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은 사람이 5만 명으로 추산된다. 고로, 한국GM의 파산은 단순히 노동자의 비극이 아니라 군산의 비극이 될 가능성이 크다.

평택의 악몽이 떠올랐다. 평택의 쌍용차 사태는 2009년 쌍용차 노조원들이 정리해고에 반발해 평택공장을 점거하고, 경찰 1000여 명이 시위자들을 진압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병으로 숨진 노동자와 가족을 모두 합치면 28명이나 된다는 보도도 있다(2015-12-30, 한겨레,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 6년만에 ‘복직 길’ 열렸다’).
공지영 작가는 르포르타주 ‘의자놀이’를 통해 쌍용차 사태를 겪은 노동자들의 트라우마와 경영진의 회계부정을 고발하기도 했다.

당시 논란의 중심에는 상하이차가 있었다. 2005년에 쌍용차를 인수한 상하이차는 신규투자나 신상품 출시 등을 게을리하고, 회계부정과 구조조정이라는 무시무시한 칼로 기업을 난도질 한 후 다시 비싼 값에 기업 M&A시장에 내놓았다. 물론 여기에는 “강성노조 덕분에 기업경영을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2013-12-26, 프리미업조선, 상하이차의 쌍용차 인수, 중국 기업의 역대 M&A 실패작 6위).

한국GM의 철수론에 대하여 조선비즈는 조심스럽게 문재인 책임론을 거론했다(2018-2-10, 문 닫은 군산공장...”GM 떠나면 다 죽어요” 벼랑 끝 몰린 군산경제). 이 수준 높은 르포기사는 후반부에 군산주민의 입을 빌려 불편한 속내를 드러낸다. 말하자면, 군산 주민들은 노조를 못마땅해하며, ‘문재인은 (군산은 내팽겨치고) 북한만 챙긴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문재인탓’, ‘북한탓’, ‘노조탓’이다.

산업재구조화로 인해 쇠락한 도시는 너무도 많다. 영국의 맨체스터와 셰필드, 선덜랜드, 미국의 디트로이트, 휴스턴, 볼티모어도 여기에 해당된다. 이 중 특히 디트로이트는 포드주의라고 표현할 만큼 대량생산의 신화와 같은 도시였다.
한국에서는 탄광이 폐쇄되면서 강원도 삼척, 태백, 정선의 많은 탄광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장기적으로 한국GM의 몰락은 자동차 제조업의 그늘이 우리나라에도 서서히 드리워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일 지 모른다.

다행히, 군산은 독특한 매력과 역사성을 가진 도시이다. 제조업 침체로 인해 도시 전체가 위기를 맞았던 뉴욕이 1970년대 문화도시 전략으로 화려하게 부활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군산의 미래는, 어쩌면 평택보다 뉴욕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군산이 뉴욕처럼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부활’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문재인 탓과 노조 탓만으로는 그런 미래를 만들 수 없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