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 문화재 이야기] 충남 기념물 제35호 공주 남혈사지
[우리지역 문화재 이야기] 충남 기념물 제35호 공주 남혈사지
  • 이훈학 기자
  • 승인 2018.04.10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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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혈사지.[사진=문화재청 제공]

[충남일보 이훈학 기자] 남혈사지는 공주시 남동쪽 1.2㎞ 지점 월성산 서쪽 자락에 있다. 이곳은 남산으로도 불리며, 서혈사지가 있는 일락산의 남동쪽 2.5㎞ 거리에 있다. 이 둘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위치와 석굴이 있다는 점 때문에 함께 거론돼 왔다. 현재 남혈사지 석굴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서혈사지가 있는 일락산을 조망할 수 있다. 

한편 ‘문화유적분 포지도’에는 사지 서쪽 해발 90m 내외의 낮은 구릉 전체가 백제시대 석실분을 위주로 한 고분군으로 보고돼 있다. 남혈사지는 서혈사지에 비해 비교적 완만한 경사면에 조성됐으며, 사지로의 접근도 수월한 편이다. 

문화재지정구역은 2916㎡이지만 사역은 이보다 더 넓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사역은 크게 남북 방향으로 흐르는 계곡을 중심으로 서쪽과 동쪽으로 구분되는데 본 보고서에서는 서쪽 평탄지 일원을 중심영역으로 동쪽 영역을 탑지영역이라 명명해 설명하고자 한다. 

현재 중심영역인 금학동 95, 96번지 일원은 복토해 보호책을 둘러놓았으나 탑지가 발견된 93번지는 가족묘원이 조성됐고, 석탑지대석도 보이지 않는다. 또한 탑지 아래쪽인 금학동 94번지는 나대지로 남아있는데 지금까지 조사된 적이 없고 수풀이 많이 우거져 진입이 어렵지만 이곳에도 사찰 관련 부속 건물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기존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중심영역 일원은 3단의 평탄지로 구분되며 이 가운데 하단과 중단부만 발굴 조사했다고 한다. 중심영역은 예전부터 경작지로 사용됐으며, 하단 평탄지의 바로 아랫단에는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탑지영역인 경작지 북동쪽 부분에는 민묘가 있어 발굴 조사에서 제약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발굴 조사한 곳과 중심영역 전체가 복토·정비돼 있으며, 평탄지의 단 구분은 모호한 상태다. 현재 평탄지 내에서 발견되는 유구는 발굴 조사에서 건물지6의 남쪽 기단으로 보고한 석렬의 상단부와 상단 평탄지 전면에 있는 석축이 전부다. 

사지 동쪽 100m 지점의 금학동 산24-1번지에는 ‘남혈’ 이라 불리는 석굴이 있다. 이 석굴은 서혈사지 석굴과 마찬가지로 내부 공간이 꽤 넓은 편이며, 수행 공간으로 사용됐던 것으로 보인다. 

석굴 앞에는 석축을 쌓아 조성한 소규모 평탄지가 있으며 이곳에서도 소량 기와편이 확인되는데 지금은 작은 암자가 들어서 있다. 기존 조사 보고서를 종합해 보면 광복 전후로 해서 암자가 들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석굴은 서향하며, 굴 입구부 측면에는 우물이 있다. 굴 내부는 전실과 후실로 구분된다. 전실의 북쪽 벽 아래쪽에는 단이 있고, 후실 서면 상단 층에는 불감으로 추정되는 암굴이 있어 불상을 각각 봉안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후실은 전실에서 한 단 높은 곳에 있으며 동쪽으로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석굴의 규모는 입구 너비 1.85m, 높이 2.35m이고, 전체 깊이 26m 정도다. 석굴 앞 평탄지에는 대웅전 1동과 요사 2동이 있다.

유구 1990년 남혈사지 발굴 조사에 의하면 중심영역 중·하 단 평탄지에서 건물지 7개소가 조사됐다고 한다. 각 평탄지의 길이는 대략 40m 정도이고, 각 단의 너비는 상단이 30m, 중단과 하단이 각각 20m 내외다. 각 단의 높이 차이는 지금은 그리 크지 않은 편이나 예전에 경작지로 사용될 때는 3m 내외의 높이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건물지는 중단 평탄지에 6개소, 하단 평탄지에 1개소가 발견됐는데 모두 조선시대에 건립된 건물지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한 이 가운데 하단 평탄지에 있던 건물지7만 대체적인 규모가 확인됐고 나머지는 잔존상태가 좋지 않아 건물지 규모나 성격을 자세히 밝히지 못했다. 

다만 중단 평탄지에서 발견된 건물지는 중첩된 양상을 통해 건물지 선·후 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중단 평탄지 북쪽에서 발견된 건물지3과 건물지4의 토층 최하층에서는 이들 건물지보다 앞선 시기의 기단석렬이 발견돼 통일신라시대 건물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건물지 규모가 대략 밝혀진 건물지7은 동서 길이 32.2m, 남북 너비 9.8m이고, 남서향(S-30°-W) 하며, 내부에 10기의 적심석 및 초석이 있다. 그러나 이 건물지도 북측 기단 동쪽 부분은 민묘가 위치하고 있어 조사하지 못했고, 조사 기간 부족으로 기단 내·외부 시설은 조사하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건물지 내부에서 출토된 솥뚜껑으로 인해 부엌과 관련된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현재 중심영역에서 보이는 유구는 석렬 1기와 석축 1기가 있다. 석렬은 중단 평탄지에 길이 3m 정도가 노출돼 있으며, 1990년 발굴 조사에서 밝혀진 건물지6의 남쪽 기단으로 추정된다. 

석렬의 좌향은 남서향(S-20°-W)이고, 길이 70~100㎝ 내외, 높이 40㎝ 정도의 석재를 2단으로 쌓았으며, 그 사이에는 길이 15~20㎝ 내외의 작은 석재를 끼워 넣었다. 현재 높이는 1m 정도다. 석축은 상단 평탄지 전면에 있으며, 높이 2.5m 정도의 토단 남단에서만 일부 확인된다.

그러나 대부분 무너져 원형을 알 수 없고 지금은 석축 부재로 보이는 석재들만 보인다. 한편 1966년 보고서에 의하면 석탑지는 주민 서상기씨 밭에서 돌무더기를 정리하다가 발견했다고 하나, 지금은 가족 묘원이 조성돼 보이지 않는다.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석탑지대석과 앙화편 등의 탑 부재를 발견했는데 지대석이 원위치로 보여 이곳에 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석탑 지대석의 좌향은 남향(S-16°-E)이고, 한 변의 길이는 잔존 판석 3매의 크기로 볼 때 1.8m 정도라고 한다. 지대석과 함께 나온 석탑 부재는 앙화편 과 갑석편, 옥개석 전 각부 파편이다.

유물 남혈사지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종류의 유물이 발견됐다. 이 중 통일신라시대로 편년되는 유물로는 거의 완형으로 출토된 주름무늬 병과 고 배 뚜껑편, 토기 개, 경질토기 대각편, 그리고 연화문 수막새 및 종선문 기와편 등이 있다. 

이 외 해무리굽 청자 저부편, 격자문, 어골문, 어골복합문(어골문+격자문) 와편, 당초문, 귀목문 암막새편 등 고려시대 유물도 다량 출토됐고, 분청자편과 백자편을 비롯해 수파문 와편 등 조선시대 유물도 확인됐다. 또한 사명은 보이지 않지만 대통(大通(?)), 대주(大週(?))로 보이는 명문 와편과, 벼루, 숫돌, 청동저, 철제솥뚜껑 등 생활 관련 유물도 확인됐다. 

특히 연화문 수막새 중 일부는 공주 공산성 및 서혈사지 등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현재 추정사역 일원은 잔디가 식재돼 지표상에서 유물이 거의 보이지 않는데 중심 영역 주변과 석굴로 오르는 임도상에서 소량의 사선복합문(사선문+초화문), 무문 와편과 백자편이 수습된다.

소재문화재 남혈사지 소재문화재는 초석, 석탑재, 금동보살입상, 토제불대좌편, 맷돌 편이 있다. 그러나 현재 추정 사역 안에서 보이지 않고, 소장처를 알 수 있는 것은 석탑 상륜부 재인 복발뿐이다. 우선 초석은 일제강점기 때 다수가 중 심 영역에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1990년 발굴 조사에서는 1매만 남아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추정 사역에서 보이지 않고, 발굴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 이후 수습해 오지 않았다고 하므로 사역 내 매몰된 것으로 추정된다. 1966년 밭 정리를 하다가 발견된 석탑 앙화편과 기단갑석 및 옥개석편, 맷돌 편은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이동됐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하지 않다. 

금동보살입상과 토제불대좌편은 1928년 경부자은(輕部慈恩)이 수습한 것이며, 이때 경부자은에 의해 반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복발을 제외한 소재문화재는 기존조사 보고서의 내용을 토대로 설명하고자 한다. 

초석은 발굴 조사 보고서에 사진과 도면이 수록됐다. 형태는 방형 초반에 2단의 원형 주좌가 있으며, 서혈사지 초석과 동일 양식이지만 주좌 크기가 조금 더 작다. 초석의 전체 크기는 81×745×26㎝이고, 방형 초반의 크기는 31×31×2㎝, 상단 원형 주좌의 지름 20㎝ 정도다. 

석탑 앙화편은 전체의 1/3 정도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크기는 전체 지름 29.5㎝ 정도이고 중앙부에 지름 4.5㎝의 찰 주공이 뚫려있다. 석탑 기단갑석 및 옥개석편 추정재는 매우 작은 조각으로 파손돼 옥개받침조차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석탑 복발은 1990년 발굴 조사 중 건물지4에서 발견됐다.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형태는 평명원형이고 상면 모서리는 둥글게 치석했으며, 측면에는 1줄의 돌기가 있다. 돌기 중심부에는 4방면에 걸쳐 4엽화문이 조각됐는데, 이 화문 중앙에는 지름 0.6㎝의 작은 홈이 있다. 

중앙부에는 지름 4㎝의 찰주공이 뚫려있다. 복발의 전체 크기는 지름 26㎝, 높이 10㎝이다. 금동보살입상은 사진이 전해지지 않지만 1928년 글에 따르면 두부와 족부의 아래쪽이 결실된 높이 7촌(寸) 정도의 보살상이며, 어깨에서 팔뚝에 걸친 곡선과 의문처리의 수법으로 보아 중국 육조(六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또한 토제불대좌편은 소형 불상의 대좌로 생각된다고 하는데 1929년 보고서에 자세한 설명이 없다. 

맷돌 편은 1966년 밭에서 석탑재와 함께 발견됐다고 전해지며, 사진이나 추가 설명이 없어 형태와 크기 등을 알 수 없다.

자료제공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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