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 문화재] 시도기념물 제36호 공주 수원사지
[우리지역 문화재] 시도기념물 제36호 공주 수원사지
  • 이훈학 기자
  • 승인 2018.04.17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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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수원사지 석탑부재.[사진=문화재청 제공]
공주 수원사지 석탑부재.[사진=문화재청 제공]

[충남일보 이훈학 기자] 수원사는 백제 때 창건된 사찰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신라 진지왕대(576~579년) 경주 흥륜사(興輪寺)에 진자(眞慈)라는 승려가 있어 항상 미륵보살을 친견하기를 기원 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한 승려가 웅천(熊川)의 수원사(水源寺)로 가면 미륵선화를 볼 수 있을 것을 알려줬고, 실제로 수원사 문밖에서 미륵선화를 친견했다고 한다.

이기록이 사실이라면 수원사는 늦어도 6세기 전반에는 창건됐을 가능성이 있다. 1530년도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주의 동쪽 5리 월성산에 있다’고 언급돼 있고, 조선 중기의 문인 조익(趙翊)의 문집에는 수원사에서 학문을 배웠다는 기록이 있어 17세기 초반까지도 사찰이 유지됐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범우고(梵宇攷)에 금폐(今廢)라고 돼 있어 18세기 후반에는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원사지에 대한 조사는 국립공주박물관에서 1967년 사지에 남아 있는 탑지를 조사하면서 시작됐다. 

1982년도에 충청남도 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된 이후, 공주대 박물관에서 1989년과 1991년 두 차례에 걸쳐 시· 발굴조사를 실시했는데 백제와 관련된 유구 및 유물은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이러한 조사결과로 인해 현재의 수원사지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언급된 수원사와 동일한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한편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사를 근거로 해 수원사가 중심이 된 웅진기 백제 미륵 신앙에 대한 연구와 웅진기 백제 도성과의 관계에서 수원 사를 파악하려는 연구도 있었다.

조사구역 현황 수원사지는 월성산의 북서쪽 ‘수원골’ 안쪽에 위치한다. 좌향은 동향이며 북쪽을 제외하고 삼면이 나지막한 산자락으로 둘러싸인 지형을 보인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공주 중심지와의 사이는 산능선으로 가로막혀 있다. 

사지는 동향의 완만한 산자락 하단부에 있다. 이곳에는 동쪽곁에 개설된 포장도로보다 약 2~3m 정도 높은 언덕이 형성돼 있다. 철제 울타리를 둘러 친 지정구역 내에는 중앙에 탑지가 있고, 그 북쪽에 5기의 건물지가 밀집돼 있다. 

시·발굴 조사가 완료된 후 탑지와 건물지 를 노출시킨 채 복토했고, 현재는 잔디를 심어 정비했다. 탑지와 건물지를 잇는 관람로가 마련돼 있고, 관람로 가장자리에는 배수로를 내었다. 

탑지 남쪽으로는 3단으로 이뤄진 넓은 완경사면이 형성돼 있다. 이곳에서는 1989년 시굴조사 시 별다른 유구가 확인되지 않았고, 현재는 잔디만 식재돼 있을 뿐이다. 지정구역 주변에는 다수의 민가와 경작지가 조성돼 있는데 서쪽에 있는 민가와 경작지도 지정구역에 포함돼 있다. 

서쪽 산자락 위에는 터널이 건설돼 있고, 북동쪽에는 주차장이 마련돼 있다. 기조사 자료와 마을주민의 전언에 따르면 지정구역의 동남쪽 가장자리에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지정구역 내에 남아있는 탑지는 1967년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처음 조사했는데 당시 탑지 안쪽에서 납석제 소탑 3점, 청동 풍탁 1점, 청동 탑편 등이 확인됐다. 또 탑지 주변에서는 소조상편이 수습됐고, 사역 외곽 우물지에서 석조 나한상 두부 3점도 발견됐다. 

한편 1989, 1991년에는 공주대 박물관에서도 기념물로 지정된 구역 전반에 대한 시·발굴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탑지 주변에서 잡석으로 만든 배수로 형태의 유구와 기초시설이 발견됐고, 탑지 북쪽으로는 총 5기의 건물지와 1기의 추정 건물지가 확인됐다. 

수원사지.[사진=문화재청 제공]
수원사지.[사진=문화재청 제공]

시·발굴조사에서 확인된 5기의 건물지는 서쪽 끝 동향의 주건물지 앞에 4기의 건물지가 2기씩 나란히 배치돼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또 각 건물지 간 거리가 매우 짧은 것이 특징이다. 

현재 주건물지는 자연석을 두른 기단부 위에, 나머지 4기의 건물지는 흙으로 돋운 기단 위에 상면이 평평한 자연석 초석이 노출된 상태로 정비 돼 있는데, 초석 중 많은 수는 새롭게 복원된 것이다. 

시·발굴조사 당시에는 전반적으로 유구의 교란이 심해 원형 복원이 가능한 것은 주건물지가 거의 유일하다고 했다. 

또 유구가 교란된 원인으로 몇 차례에 걸친 증축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했는데 사찰은 최소 한차례 이상 중건된 것으로 봤다. 다만 주건물지 앞 동단 건물지 부근은 상하 유구의 중복관계가 비교적 뚜렷하게 남아있어 초창유구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부석시설, 범종주조 시설, 배수로 등이 하층에서 확인되기도 했다.

주건물지는 5×4칸 규모로 가장 크고, 동향이며, 현재 남아 있는 기단부의 크기는 22×12m이다. 조사 당시 중앙에 불단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부석시설이 일부 확인되기도 했다. 주건물지 정면 좌우측에는 2기의 건물지가 나란히 놓여 있다. 좌측 건물지는 3×3칸 규모이며, 남향으로 추정됐다. 

조사 당시 적심간 거리는 정면이 어칸 2.8m, 협칸 2.4m, 측면이 어칸 2.4m, 협칸 1.5m이다. 우측 건물지 역시 3×3칸 규모이며, 북향한 것으 로 추정됐는데 따라서 좌측 건물지와 마주보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조사 당시 적심간 거리는 정면이 어칸 3.6m, 협칸 3.2m이며, 측면이 어칸 2.7m, 앞뒤 협칸이 각각 2.1m, 1.8m이다. 현재 초석은 배치돼 있지 않다.

한편 주건물지 앞 동단에 남북으로 배치된 2기의 건물지가 있다. 북쪽 건물지는 북향으로 추정됐으며, 유일하게 주건물지와 같은 축선 상에 조성돼 있다. 확인된 규모는 3×1칸이며, 조사 당시 적심 간 거리는 3.6m이다. 

수원사지.[사진=문화재청 제공]
수원사지.[사진=문화재청 제공]

또 내부 중앙에서 3.2×0.3m 크기의 용도를 알 수 없는 배수로 형태시설이 확인됐다. 남쪽 건물지는 1×1칸의 소규모이며, 남향으로 추정됐고, 조사당시 적심간거리는 2.8m이다. 이 건물지 남쪽에서도 북향한 것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건물지의 흔적이 확인됐지만, 명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시·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동종, 석불좌상편, 석탑 상륜 부재를 비롯해서 막새편, 명문 와편, 토기편, 청자편, 분청자편, 백자편 등이 있다. 대체로 통일신라 말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는 양상을 띠며, 백제 때 것으로 추정될 만한 것은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한편 명문 와편 중에는 나한전(羅漢殿) 글자가 새겨진 것도 있어 수원사에는 나한 을 모신 전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1967년에 발견된 석조 나한상 두부 3점이 이와 관련된 유물로 판단된다.

소재문화재 수원사지에 남아 있는 소재문화재는 탑지에 놓여 있는 하층기단 일부뿐인데 이번  조사 중 서쪽 민가 옆에서 치 석재 1매를 추가로 확인했다. 탑지는 총 7매의 지대석을 방형으로 결구했으며, 규모가 303×312㎝이다. 

지대석 위에는 총 15매의 석탑 하층기단 부재가 놓여 있다. 현재 높이 50㎝이며, 남면은 너비가 282㎝이다. 남면과 서면에는 우주 1주, 탱주 2주가 새겨진 하층기단 면석이 2매씩 남아 있다. 공주대 박물관에서 조사했을 때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추정했다. 

한편 서쪽 민가 옆에서 기단석으로 추정되는 장방형 치석재가 확인됐다. 크기는 길이 101㎝, 너비 37㎝이며, 상면에 각호형 2단 괴임이 있다. 1967년 발굴조사로 출토된 유물들은 현재 국립공주박 물관에 소장돼 있다. 

그 중 확인된 것은 석조 나한상 두부 3점과 납석제 소탑 3점이다. 나한상은 조사 당시 보살 두로 봤는데 두건을 쓴 나한상이 명확하다. 전반적으로 나한상2, 3이 비슷한 양식을 보이며, 나한상1과는 차이가 있다. 

나한상1은 나한상2, 3과 석질이 다르며, 크기도 길이 15.7㎝, 너비 14.5㎝, 두께 12.5㎝로 약간 작다. 머리에 쓴 두건은 양 볼을 덮고 있고, 주름은 표현돼 있지 않다. 둥근 얼굴에 이목구비는 심하게 마모돼 있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온화한 인상이 남아있다. 

전반적으로 조각 수법이 소략한 것으로 보아 나한상2, 3보다는 후 대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나한상2, 3은 크기가 길이 약 17㎝, 너비 약 13㎝이며, 두께는 나한상2가 11.5㎝, 나한상3이 9.7㎝이다. 머리에 뒤집어쓴 두건은 양쪽 귀를 덮고 어깨까지 드리워 있으며, 뒷면 하단과 양측면 하단에 층단식 세로 주름이 표현돼 있다. 

이마는 좁고, 얼굴은 계란형이다. 나한상2는 미간에 지름 1.1㎝의 백호가 돌출돼 있다. 큰 곡선을 이룬 눈썹 아래에 길게 찢어진 두 눈이 있고, 코는 폭이 좁고 긴 편이며, 짧은 인중 밑에 작고 도톰한 입술을 표현했다. 

양 볼에는 살집이 올라있다. 작고 짧은 입술과 인중, 부풀어있는 양볼에서 느껴지는 인상은 강릉지역에서 확인되는 고려 후기 보살상과 유사하다. 나한상3은 안면의 마모가 심해 도톰한 입술을 제외하면 거의 알아보기가 힘든 상태이나, 나한상2와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납석제 소탑은 3점 모두 평면 방형이며, 하면에 용도를 알 수 없는 홈이 있다. 또 상륜부는 모두 결실돼 있다. 형태는 모두 달라 소탑1, 2는 5층, 소탑3은 3층이다. 소 탑2, 3은 기단부와 탑신부의 구분이 비교적 명확하다. 

크기는 현재 높이 5.3~8.3㎝, 너비 2.9~3.8㎝이며, 하면 홈의 크기는 지름 1~2.5㎝, 깊이 1.5~2㎝이다. 소탑3은 기단부 한쪽 면에 ‘功◯屋(?)’ 글자가 새겨져 있다. 1989년과 1991년도 조사 때 출토된 유물들은 현재 공주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특히 동종은 높이 26㎝, 입구 지름 18.4㎝, 두께 1.8㎝로 소형이지만, 고려시대 동 종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주건물지 주변에서 출토됐으며, 용뉴와 음통이 있는 상부 가장자리에는 입식문대 가 둘러져 있다. 상대에 범자가 새겨져 있으나 명확한 판독은 어려운 상태다. 

상대 아래쪽에 등간격으로 마련된 4개의 연곽 안에는 각 9개씩의 연뢰가 돌출돼 있다. 종신 하부에는 역시 등간격으로 4곳에 원형 광배를 두른 보살상으로 추정되는 좌상을 새겨 넣었고, 당좌는 확인되지 않는다. 하대에는 연화당초문과 연주문 띠가 상하로 새겨져 있다. 

한편 주건물지에서는 나한상으로 추정되는 소조상편 과 석불좌상편도 출토됐다. 소조상편은 두부, 손, 발 등이 확인되는데 그중 상태가 나은 두부는 크기가 현재 길이 14.6㎝이며, 음각으로 새긴 눈과 눈썹, 별도로 제작해 붙인 오른쪽 귀와 코가 남아 있다. 

석불좌상편은 하반신과 왼팔, 오른손 일부만 남아 있으며, 크기는 현재 높이 19㎝, 너비 35㎝이다. 복부에 모은 양손은 지권인을 취한 것으로 봤으며, 복부 아래쪽으로 크게 반원형을 이루며 흘러내린 법의가 표현돼 있다. 

그 밖에 석탑 상륜부재인 앙화와 복발도 출토됐는데 모두 중앙에 찰주공이 뚫려 있다. 앙화는 크기가 높이 10.4㎝, 너비 21.4㎝이고, 복발은 반파됐는데 크기는 높이 15.3㎝, 지름 26.7㎝이다.

자료제공 : 문화재청

수원사지.[사진=문화재청 제공]
수원사지 동종.[사진=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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