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 문화재] 사적 제435호 부여 금강사지
[우리지역 문화재] 사적 제435호 부여 금강사지
  • 이훈학 기자
  • 승인 2018.06.19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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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사지는 사명 및 운영 시기와 관련된 문헌을 확인할 수 없으나 발굴 출토유물에서 ‘金剛寺’銘 와편이 확인돼 사명을 비정할 수 있었다. 다만 ‘金剛寺’銘 와편이 고려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돼 초창 당시의 이름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리고 조선시대 문헌인 ‘新增東國輿地勝覽’, ‘大東地志’, ‘扶餘誌’, ‘扶餘縣邑誌’에 ‘金剛川이 기록돼 있는데 금강사와 관련된 지명으로 추정된다.

금강사지의 발굴조사는 1964년과 1966년 2차례에 걸쳐 국립박물관에서 실시했다. 조사 당시 사지 일원에는 민가 4채가 있고,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었다. 조사방식은 전면 발굴이 아닌 유구가 확인된 주요건물지에 대한 부분 발굴조사였다. 

발굴결과 사지는 백제의 전형적 1塔1金 堂式 가람배치를 하고 있으며, 동서를 중심축으로 중문지와 목탑지, 금당지, 강당지, 승방지가 나란히 조성돼 있고, 강당지와 중문지를 연결하는 회랑이 확인됐다.

이후 간행된 자료는 앞선 발굴자료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다만 2008년의 ‘백제폐사지 학술조사보고서’는 기존 유적 현황을 통해 향후 복원·정비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2011년에는 금강사지의 발굴조사 내용을 통해 금 강사지의 가람배치 및 기단구조와 관련된 연구논문이 발표된다. 

이동영은 사비시기에 부여지역의 가람을 정리해 결론을 도출했는데 금강사지는 대상 중 하나다. 김선기는 금강사지의 기단구조는 일반적인 백제 가람에서 보이는 가구식 기단으로 해석하기에 무리가 있다고 했다. 조원창은 금강사지 출토 와당을 통해 창건 시기를 검토한 후 금당지 기단의 특성을 살펴봤다.

2014년에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한 물리탐사 결과를 통해 건물지가 새롭게 확인됐다. 따라서 2015년에는 사지 남서쪽 일원에 대한 시굴조사가 이뤄졌으며 이를 바탕으로 2016년에는 추가 시·발굴조사가 진행됐다. 

조사결과 승방지 좌·우로 북승방지와 남승방지, 추정 문지 등이 추가로 확인됐다. 2017년에는 새롭게 확인된 승방지 일원에 대한 확장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조사구역 현황 금강사지는 금공리 월미산의 동쪽 기슭에 위치한다. 이곳 서쪽은 월미산이 남북으로 형성돼 있고, 북·동·남 쪽은 金剛川으로 불렸던 之川이 감싸 안고 흐르며, 동쪽으로 망월산과 마주하고 있다. 지천은 사지 동쪽에서 남류하며 호암리에 이르러 금강에 합류한다.

사지는 사비시기 도성 외곽에 위치하며 당시에 조성된 대표적인 사지 중 부여 왕흥사지와 호암사지가 가까이에 있다. 금강사지는 1964년과 1966년에 진행된 발굴조사를 통해 사명과 운영시기, 가람배치 등을 확인했다. 

사지는 백제 시대의 일반적인 1탑1금당식 가람구조이나 동서를 중 심축으로하는 특이점이 있다. 전각은 동쪽부터 ‘중문지- 목탑지-금당지-강당지-승방지’가 일직선상에 있고, 중문지에서 강당지까지 회랑이 연결돼 있다. 

또한 강당지와 승방지는 행랑으로 연결돼 있으며, 북회랑 외곽으로 건물지가 확인돼 북승방지로 추정하고 있다. 중문지는 판축으로 쌓은 기단토만 남아있으며, 이를 통해 기단의 규모를 추정하면 44×35尺이다. 

기단토의 남북모서리 부분에서 기단석을 세웠던 자리가 남아있어 우주를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목탑지는 강당지에서 서쪽으로 41尺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2차례에 걸쳐 개축된 흔적이 확인된다. 

창건 기단 토는 판축공법이며, 한 층의 두께가 5~6㎝이고, 전체 높이는 약 6尺에 달한다. 또한 기단토를 토대로 탑기단의 규모를 추정하면 한 변이 약 47尺이다. 그리고 기단토의 주변으로 폭 2尺 내외, 깊이 3~4尺 내외의 얕은 홈이 있어 기단 지대석의 자리로 판단된다. 

또한 창건기단의 높이는 5尺이 넘었을 것으로 판단돼 이중기단으로 추정된다. 창건기단이 어떻게 파괴됐는지 알 수 없으나 기단토 주변으로 2차 기단토가 보축돼 있다. 이후 2차 기단 역시 파괴됐는데, 그 상면에서 燒土層이 확인돼 화재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3차 기단은 잡석들을 이용해 쌓았으며, 한 변이 약 39尺, 높이 약 1尺이다. 기단의 북편에서 청자편이 확인돼 고려 시대에 보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목탑지지하에서는 심초부분이 확인됐는데, 자연의 화강암층을 깎아내어 원형초석 모양을 만들고 가운데 지름 4尺, 깊이 2.2尺의 구멍을 팠다. 

심초 구멍 바닥에서 나뭇가지를 엮어서 만든 방형 용기(9×6 尺)가 발견됐으나 형태를 거의 알아볼 수 없었으며, 내용물도 확인되지 않았다. 금당지는 목탑지에서 서쪽으로 약 53尺 떨어져 있으며, 목탑지와 같이 2차례 개축된 흔적이 있다. 기단토와 가구식 기단석 일부가 확인되며, 규모는 63×46尺이다. 지대 석 상면에 면석과 우주를 세우기 위한 홈이 있어 면석과 갑석을 갖춘 단층 기단으로 추정된다. 

또 지대석 주변으로 補石으로 불리는 산수시설이 있다. 기단토는 목탑지 와 같은 판축인데, 창건기단토는 규모가 70×59尺이며, 재건기단토 규모는 63.5×46尺이다. 창건기단토가 파괴돼 낮아진 기단 상면에 적심석군이 조성돼 건물이 세워졌는데 주변에서 소토층이 확인돼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재건기단토는 기와편을 포함한 두께 1.3 尺의 토층을 덮어 조성했으며, 약간 북쪽으로 옮겨 축소됐다. 이때 백제시대와 통일신라 시대 막새가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기단 배면의 서쪽에 색이 다른 기단토가 확인되는데 보수된 부분으로 보인다. 

이 기단 주변에서는 불에 탄 기와조각, 숯조각 등이 두껍게 쌓여 있으며, 귀목문 막새가 확인된다. 강당지는 금당지에서 서쪽으로 약 88尺 떨어져 있으며, 거의 삭평돼 기단석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다만 강당지의 규모는 150×63尺이며 동남쪽 모서리에는 판석형의 기단석 1매가 있다. 

기단토는 판축이 아니며 생토 층까지 삭평한 뒤에 조성한 것이다. 강당 좌·우측면에는 회랑이 연결돼 있고, 서쪽으로는 승방과 연결된 행랑이 있다. 회랑지는 남쪽과 서쪽이 일부 남아있으며, 대부분이 파괴됐다. 기단의 너비는 19.7尺이며, 높이는 4~5尺이 다. 승방지는 강당지 서쪽으로 약 35尺 떨어져 있으며, 규모는 약 292×46尺이다. 

기단토는 강당지와 같이 생토층까지 삭평한 뒤에 조성했으며, 장방형 판석형태의 기단석이 남아있다. 기단 상면에 초석은 확인되지 않으나 적심석이 잘 남아있다. 승방지 북쪽 회랑지 밖으로 동서로 길게 뻗은 건물지가 발견되는데, 북승방지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내용을 정리하면 금강사지는 백제 사비기에 창건됐고, 2차례에 걸쳐 중건된다. 1차 중건은 통일신라 시대에 이뤄졌으며, 2차 중건은 고려시대다. 그리고 금당지와 목탑지 주변에서 불에 탄 기와조각, 숯조각, 소토층 등과 귀목문 막새가 확인됐고, 이후 재건된 흔적이 확인되지 않아 고려시대에 화재로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원창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연화문 막새를 부여 및 익산지역의 백제시대에 제작된 막새와 비교해 편년을 6세기 4/4분기 무렵이나 그 이후로 추정했는데 이를 토대로 금강사가 6세기 4/4분기 무렵에 창건됐을 것으로 판단했다. 

2014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금강사지 일원에 대한 물리탐사를 통해 기존에 보고된 건물지 이외의 유구를 확인했으며, 남서쪽 일원에 대한 시굴조사를 진행했다. 조사 결과 강당지 남·북쪽에서 확인되는 석렬은 각각 남승방지, 북승방지로 추정했고, 승방지 서쪽에서는 배수로로 추정되는 석렬이 확인됐다. 

이후 2016년에는 강당지와 서승방지 남쪽 일원에 대한 정밀발굴조사와 2015년 조사 때 수목이 제거되지 않아 진행하지 못했던 사역 동쪽 일원의 시굴조사를 진행했다. 발굴조사에서는 남승방지의 남쪽 기단 전면이 확인됐고, 그 외곽으로 추정 문지와 담장 2기, 구상유구 3기 등이 출토됐다. 

특히 남승방지의 경우 백제 때 건립된 이후 통일신라~고려 시대에 2차례에 걸쳐 개축된 것으로 파악됐다. 시굴조사에서는 중문지의 기단석렬과 북승방지의 기단 등을 확인했다. 사역은 지천과 맞닿아 있는 방형에 가까운 평탄지 일원이다. 

이곳은 북쪽과 동쪽으로 토단이 형성돼 있으며, 남쪽은 완만한 사면을 이룬다. 사지는 과거 경작지와 민가가 조성돼 있었으나 현재 대부분은 공터로 방치돼 있다. 공터는 과거 시·발굴조사돼 복토된 곳이며, 민가는 폐가 1채(15-2번지)만 제외하고 이전됐다. 그리고 곳곳에 작은 규모의 경작지가 있다. 따라서 지표상에서 유구는 확인되지 않으나, 건물지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치석재가 다수 보인다. 

치석재는 사지 남쪽에 6매, 폐가에 22매, 사지 남쪽 입구의 민가)에 17매가 있다. 사지의 남쪽 입구에는 근래에 상부를 시멘트로 정비한 우물이 있는데, 마을주민에 의하면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유물은 평탄지 전역에서 확인되며, 특히 지정구역 외에 평탄지 북쪽(50-3번지) 경작지에서도 다량의 유물이 확인된다. 사적지정구역에서는 백제에서 고려 시대에 제작된 연화문 수막새와 종선문, 사격자문, 어골문, 어골복합 문(어골문+종선문+횡선문) 와편, 연목와, 토기편, 청자 편 등이 산포하며, 북쪽 경작지에서는 선문, 기하학문 와 편과 토기편, 청자편 등 통일신라에서 고려 시대에 조성된 유물이 있다.

자료제공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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