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유자적 강변에서 보물찾기 ‘수석(水石) 사랑’
유유자적 강변에서 보물찾기 ‘수석(水石) 사랑’
  • 탄탄스님
  • 승인 2018.06.21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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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스님(여진선원 주지, 용인대 객원교수)
탄탄스님(여진선원 주지, 용인대 객원교수)

최영 장군께서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하셨다던가. 필자는 도서 수집에 이어 ‘돌을 황금 보듯이’ 하는 또 다른 수집벽이 있으니 소개하여 본다.

여름이 되면 더위를 피하여 강가나 해변을 찾는 발걸음이 잦아들 테니, 시기나 계절적으로도 적합한 글이지 않을까 싶다.

강이나 바닷가의 돌밭 또는 산중에서 기이하게 생긴 돌을 수집하여 그 묘취를 즐겨 사랑하는 취미를 표현하여 이를테면, ‘탐석’이라 이름한다. 우리의 애석문화의 근본은 불교, 유교, 도교사상의 정신문화가 근저에 내재되어 있는데 괴이하고 특별난 모양새의 돌을 ‘水石’이라고 하며, 수석이란 두 손으로 들 정도 이하의 작은 자연석으로 산수미의 경치가 축소되어 있고, 기묘함을 나타내고, 회화적인 색채와 무늬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더 나아가 환상적인 추상미를 발산하는 것으로 정서적인 감흥을 불러일으켜, 수석이라 하는 것이다.

여기에 큰 정원석과 구별되는 자그마한 돌이 천연 그대로여야 하는데, 주로 실내에서 감상하는 이 취미의 바탕은 대자연은 곧 나이고 나는 대자연의 일부분이라는 자연과 인간과의 혼연일체에 도달하여 자연의 깊은 이치를 갖가지로 이해하려는 동양의 사상이 오롯하게 담겨있는 것이다.

일찍이 대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을 뜰 안에 조성하는 축경조원(縮景造園)을 일본에 가르친 사람이 백제의 노자공(路子工)이다. 일본에서 분경(盆景)과 수석의 시초를 싹트게 하였는데, 이 축경조원의 형식은 신라시대의 옛 자취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곳곳에서 선조들이 꾸며놓은 그러한 자취가 발견되고 있다.

이미 약 3000년 전에 수석에 대한 기록이 중국 최고(最古) 지리서인 ‘서경’의 우공편(禹貢篇)이나 주나라 초기의 ‘시경’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당·송·명나라 시대에도 이미 애석(愛石)을 해온 기록이 상당히 전하여지고 있다. 예부터 우리나라의 애석기풍은 첫째 토속적인 배석신앙(拜石信仰)에 의한 자생적인 애석열과, 둘째는 산서석을 주체로 한 중국의 영향, 셋째는 불교정신의 애석풍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신비한 암석 앞에 엎드려 부귀와 번영을 기구하고 또는 아들 낳기를 갈구하는 등의 가지가지 절절한 소원을 비는 의식이 민중 속에 강한 양상으로 나타났으며, 이런 배석신앙은 오늘에도 잔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습속은 돌과 바위와의 친화력을 가지게 하여 진귀한 돌이라며 신령스러운 것으로서 소중히 여기고자 하는 기풍이 널리 민중 속에 퍼지게 되어 민화에서도 괴석이 그려져 있는 것을 많이 엿 볼 수 있으니 돌은 굳고 곧은 덕을 품고 있다 하여 덕성과 절개의 상징으로도 삼는다.

당·송대에 걸친 저명 문인·서화가들의 산수석을 애완하는 풍류가 짙게 전해지고 있는데 특히 조선의 선비 강희안(姜希顔)의 저작인 ‘양화소록 養花小錄’은 수석의 보배로운 고전으로서 산수석의 참다운 멋을 가르치고 있다. 비원에 그러한 독창적인 형상을 지닌 전래정석(傳來庭石)들이 상당하게 남아 있다.

또한 서울의 운현궁 자리와 신촌의 봉원사에서도 그런 궁중석 형태를 볼 수가 있다. 정약용·김정희·이하응 등 조선시대의 수많은 문인·서화가들이 애석하였던 기록과 자취도 남아 있으며 진귀한 돌을 흠모하고 애완하는 가운데 그려낸 옛 선비들의 괴석도(怪石圖)가 널리 산재해 있는 것만 보아도 한국인의 열성 어린 애석기풍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불교의 선사상(禪思想)에 의하여 돌을 애완한 자취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당나라에서 ‘화엄경’을 배워온 신라의 승려 승전법사(勝詮法師)는 80개의 돌무리를 향하여 불경을 개강하면서 돌을 아꼈다.

통영 앞바다의 연화도(蓮花島)에는 400년 전에 비구니 연화도인이 모셔놓은 둥근 돌이 현존하고 있다고 한다. 경남 하동군 칠불암(七佛庵) 경내에는 예전의 스님네들이 아낀 괴석들이 늘어져 있으며, 추월(秋月)스님이 500년 전에 아꼈던 제수마석(除睡魔石)이라 불리는 둥근 돌이 쌍계사 주지실에 보존되어 있다고 하며, 해남 대흥사에는 수석은 아니더라도 서산대사(西山大師)께서 아끼셨던 수정석(水晶石)이 남아 있다고 한다.

예로부터 이렇게 많은 스님들은 선석(禪石)이라 하여 기품있는 돌을 애완하였던 자취가 널리 전해지고 있으며, 옛 선비들이 돌을 사랑하였던 것은 자연을 우러르는 정감과 대자연이 인간에게 교시하는 진리를 아꼈기 때문이고, 인간의 작위(作爲)와 생활의 번잡스러움을 뿌리치고서 자연의 품속에 가장 참된 평화를 두었기 때문이며 가슴 속에서 속기(俗氣)를 물리치고 마음과 돌 사이에 교감하며 돌과 대화를 가짐으로써 사상적으로 동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고한 품성과 깊은 학문과 자연과 인간의 합일정신 그리고 정감이 풍부한 예술가적 기질로서 돌에대한 사랑은 한적(閑適)을 즐기기에도 적합하고 오직 자연미를 찾는 데에 합당하였던 것이다.

수석을 어루만지며 꿋꿋한 절개와 고상한 인품으로 부귀한 자의 허망된 작위를 냉소하였고, 명예로운 관직은 성가시게 여겨 과감히 내던지고 초야에 은거하였던 지극히 인생을 사랑한 사람들이 곧 애석인들 이었다.

백낙천(白樂天)은 일찌기 시문에서 읊기를 “3산 5악의 수백 골짜기와 수천 구렁 따위의 여러 가지가 더할 나위 없이 한 군데로 축소되어 그 가운데에 나타나 있는 것이며 백길이나 되는 것도 한주먹 안에 들고 천리나 떨어진 경개도 한눈에 들어오니 이것을 앉아서 다 볼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수석 감상의 요체이며 묘미이다.

기나긴 세월을 만고풍상으로 겪어온 창연한 시대감이 돋보이는 적정(寂靜)한 고태(古態)의 멋이 그윽하게 살아 있을수록 좋으며, 이것은 수석의 밑바탕에 흐르는 정신(石心)인 것이다.

이를 중시하여 예로부터 노태수석(老苔壽石)·수석만년(壽石萬年)·수석노불(壽石老佛)이라 하였다. 균형이 잡혀야 할 것은 물론 선(線)의 흐름이 유연해야 하며, 변화 있는 주름 굴곡과 표면이 개성적일수록 좋으나 깨어진 듯한 자국이 있으면 하품으로 여긴다.

이처럼 수석이 지녀야 할 조건을 고루 갖추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므로 질·색·형·곡의 4대 요소 중에서 어느 쪽이든 장점을 내포하고 있으면 취택한다. 형이 미흡하지만 색질이 뛰어났다든지 색질이 모자라지만 형과 곡이 우수하면 좋게 받아들여야 한다. 수석이 갖추어야 할 조건을 생각하면서 탐석행(探石行)을 시작한다.

수석이 나오는 곳은 일반적으로 강의 중류지역의 돌밭이 위주가 되며, 다음은 바닷가의 우묵하게 굽어들어간 ‘곡(灣)’에 널리 있는 돌밭이다. 아무데서나 탐석되는 것이 아니며 수석감이 산출되는 지역이 따로 있는 법이다. 그래서 수석 산지에 대한 예비지식을 익히고 탐석해야 하며 그러는 사이에 새로운 산지를 발견하는 행운을 만나기도 한다. 때로는 흙 속에서 기묘한 돌이 나오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수석 산지로는 여러 곳에 걸쳐 산재해 있다.

남한강 일대와 금강 상류는 수몰되어 지금은 탐석의 성과가 거의 없다. 특히, 문경의 농암천, 울산 일대, 경주의 강줄기, 보성의 제석산 토중석, 고성의 토중석, 통영군의 섬들, 지리산의 토중석, 청송의 꽃무늬석, 영덕의 오십천과 양양천·매화천, 파계사의 토중석 등이 있다. 특히 제주도 해안 일대의 돌밭이 유명하며 그 밖에 수많은 수석 산지들이 있는데, 지금은 열띤 탐석에 의하여 수석감이 귀한 형편이 되었다.

수석 산지는 암석층의 분포와 관계가 깊지만 지질 연구에 의한 수석 산지 탐색은 어긋나는 점이 많은데 이것은 수석이 갖추어야 할 특징 때문이며 탐석을 해왔으면 흙때·물때와 끼인 모래알 따위를 말끔히 닦아내어 수석 본연이 지닌 때깔과 자연미를 되살려야 한다. 그런 다음에 연출 배열이 필요하다. 돌의 형태에 적합하도록 좌대를 정교하게 제작하여 돌을 받쳐놓는 경우는 대개 물형석·무늬석·추상석 등에 이에 합당하다.

또 수반(水盤)을 주로 이용하는 산수석은 수반에 맑은 모래를 깔고 알맞은 위치에 자리잡아 산수경정(山水景情)이 돋보이게 한다. 수석에 기름칠을 하는 행위는 자연미를 역행하는 것이며 애석문화에 대한 몰이해에서 하는 짓이다.

좌대석(座臺石)은 쓰다듬거나 또는 헝겊으로 닦고 문지르는 사이에 날로 깊은 때깔의 멋을 지니게 된다.감상할 때마다 물을 뿌려서 생동감을 나타내고 그러는 동안안 깊은 색조를 띠기 시작한다. 끊임없는 손질과 또 오랜 세월 사람과 더불어 동반하는 사이에 수석은 저절로 그윽한 고태의 색조를 띠게 되며 이것을 양석(養石)이라고 한다. 이 양석 과정을 거치는 감상을 도외시하면 참다운 애석이 되지 못한다.

탐석은 자연미의 발견이며 감상을 위한 것은 미의 구성으로써 어떻게 하면 보다 더 품위있는 수석으로 돋보이느냐 하는 성숙된 심미안과 창의력이 필요하다. 필자는 조지훈, 박두진, 전봉건이 남긴 수석 관련 에세이를 수 없이 애독하며 틈내는 대로 탐석도 한다.

필자의 돌사랑은 이미 중·고교 시절부터 시작되었으나, 한 곳에 오래도록 머물지 못하는 환경으로 그 당시부터 수집하였던 명석들이 남의 수중으로 떠난 아쉬움이 있다. 수석 산지로 입소문이 자자한 괴산, 청천, 미원 인근에서 유년기를 보낸 필자는 이미 초등학교 시절에도 강변에 나가 돌을 줍기도 하였으니 수석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남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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