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무용론과 ‘먹물’들의 습성
서울대 무용론과 ‘먹물’들의 습성
  • 탄탄스님
  • 승인 2018.08.0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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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스님(여진선원 주지, 용인대 객원교수)
탄탄스님(여진선원 주지, 용인대 객원교수)

서울대 폐지 혹은 국·공립대 통합 이야기가 식자들의 안주꺼리로 익어가고 있다. 서울대 무용론까지 대두 되고 있는 시점이다.

한국인은 혈연·지연·학연 등으로 대표되는 연고주의와 자신이 속할 조직을 만들어 그 조직의 힘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소속된 개인들이 그 이득을 취하려는 부당한 성향이 너무도 견고하다. 외모지상주의, 학벌주의, 엘리트주의, 패권주의는 실상 다른 듯 보이지만 그 이면에 내재된 심리는 거의 동일하다.

끊임없이 남 위에 올라서기 위해 남들보다 더 우월한 것들을 가지려는 마음을 일으킨 탐욕과 불안, 사실 기득권에 대한 혜택은 나름의 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대학 타이틀로 혜택을 보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그 극소수 명문대에 진학하기 위해 수많은 학생들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 학창시절 공부에 임하게 되는 것, 그로 인해 전 국민의 교육수준이 상향평준화가 되고 이것이 과거 권위주의 산업화 발전시기부터 최근까지 이른바 명문대 출신에 대한 혜택이 가져다 준 시너지 효과였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 가고 있다. 더 이상 명문대 출신이라고 하여도 특별히 혜택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고, 명문대에 가기 위해 학창시절을 공부에 바치는 것이 개인으로서나 국가적으로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시대가 급박하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이사회에서 개인에게 요구하는 능력들이 다양해지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명문대 진학이 목표인 수험생에게는 우이독경이겠지만, 분명 이 사회는 어느 때부터인가 필요로 하는 인재상이 다양해지고 기업에서도 창의적이고 기발한 두뇌를 지닌 신입사원을 더욱 선호한다. 개개인들이 타고나는 재능은 무척 다양하며 얼마든지 자기 개발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현재의 대학교육이 직업으로 환원할 수 있는 공부나 일을 가장 큰 가치로 여기는 사회에서 개인이 공부 외의 다른 길을 택하는 것은 쉽지가 않고, 모든 사람들을 열심히 공부하도록 하려면 기득권 혜택을 누릴 대학의 존재도 필요하기도 하며 어쩌면 이것이 서울대의 존재가 가진 양날의 검이다.

서울대든 연·고대든 무작정 명문대를 없애는 것은 계속해서 이름만 바꾼 또 다른 명문대를 만들어내는 결과만을 가져올 우려가 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지성들이 부정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선택은 대학 전체에 대한 제도적 개혁이다. 대학이 바뀌면 일선 교육 현장은 알아서 따라오게 될 것이다.

지난날 이 땅에서의 교육은 한 번도 ‘공부’를 하나의 재능 중 하나로 여겨본 적이 없고, ‘공부’ 외의 개인의 타고난 능력들을 재능이라 여겨본 적이 없다. 타고난 재능은 무척 중요하다.그리고 그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말 잘하는 것도 재능이고, 외모를 잘 꾸미는 것도 재능이며, 손재주가 좋은 것도 재능이고, 야구나 축구를 잘하는 것도 재능 중 하나다. 그렇다면 사실 공부 역시 하나의 재능일 뿐 이다.

많은 학원들에서 누구나 열심히 공부하면 다들 명문대에 갈 수 있다며 원생들을 모집하겠지만, 공부를 좀 해 본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깨닫게 된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상위 1~3%에 불과하다. 모두가 이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만 공부 잘하는 능력이 이 사회에서 얼마나 쓸모가 있는지와 별개로 공부는 그냥 타고난 재능일 뿐인데, 공부 외에 사람들이 타고나는 여러 재능들을 사회적으로 쓸모 있게 개발하는 방법을 여전히 도외시하고 있다.

그러한 재능을 바탕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대학 교육 기관에 교수로 앉힐 생각은 전혀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부 외에 타고난 재능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비슷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교육을 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교육의 장이 마련되어 있지가 않다. 타고난 재능을 사회적으로 쓸모 있게 만드는 것이 교육의 핵심이며 과제이지만, 재능을 활용하는 법을 사람들이 알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재능을 활용해서 길을 뚫어 성공했던 사람들의 교육이 필요하다.

애시당초 교육의 가장 큰 목표가 무엇인가? 먼저 길을 걸었던 사람이 후배들에게 그 길에 대한 안내도를 미리 전수해주는 것이 목표가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공부는 타고난 재능일 뿐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죽어라 공부만 시켜도 공부가 체질이 아니거나 공부보다 다른 재능을 가진 아이의 창의성을 말살하고 주입식 학습을 강요 하는 한국의 교육제도는 이렇게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그 폐단에는 모른 척하며 곪아가고 있는데도 그 누구도 말하려 하지 않는다.

문제는 공부에 재능 있는 사람들이 모인 명문대 탓으로만 돌릴 뿐다. 인성교육이 부재되었다는 둥, 객관식 사지선다형 시험과 암기위주의 시험이 문제라는 둥, 이렇게 지엽적인 문제만을 공론화 하고 있다.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은 더 이상 공부를 잘하는 재능이 사회에 대단히 쓸모 있는 재능이 아닌 시대가 되었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다른 재능들도 이 사회에 매우 유익하게 쓰이게 되었지만, 아직 사람들은 그 방법을 모른다. 그 길을 전수해 줄 사람도 만나기 쉽지 않고 그런 공간도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대가 없어지든 통합되든 필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다만 사실 이 학교 출신들의 황당무계한 엘리트 의식과 시건방진 패거리 조직 문화가 학계와 정계 관계를 물들인 부패의 폐단을 지적하고 그 원인을 제고해본다면 국립 서울대는 반드시 폐지되는 것이 마땅하며, 대한민국 국민 99%를 위해 서울대를 폐지하고 국공립대로 통합캠퍼스를 구축하여 프랑스 파리 1~13대학의 모델로 개편되어야 하며, 국공립대학 반값 등록금이 실현되어질 때 교육의 균등이 이루어지고 고질적인 부패구조가 허물어지는 것이다.

서울대 먹물들이 이 사회에 오염시킨 원죄를 더 이상 차단케 하려면 먹물의 오만한 근원을 뿌리 뽑아야 한다. 물론 먹물을 품고 사는 건, 문어나 낙지나 오징어나 인간이나 다를 게 없지만,그 쓰임새는 많이 다르다. 오징어나 문어는 놀라거나 성이 나면 먹물을 뿜는데, 이는 포식자의 시야를 가리는 연막 효과는 물론이고, 포식자의 후각이나 미각 등 전반적인 감각기능을 마비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 사회에서의 먹물의 쓰임새는 다르다. 달라도 많이 다르다. 특히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먹물은 아주 비열하게 쓰인다.

흔히 공부깨나 한 사람을 보고 먹물 좀 먹었다는 말로 빗대곤 하기도 하는데, 가방끈이 길다는 말과도 한통속이고 먹물 좀 먹은 것과 끈이 긴 것으로 치자면 바다에 사는 문어나 낙지를 따라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먹물 티를 내고 가방끈을 논하는, 이른바 ‘끈 이론’으로 우주의 모든 것을 재단하는 자들이 우리 사회를 좀먹고 있는 것이다.

이 먹물 좀 먹은 엘리트 의식과 잘난척하는 자들이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데, 소위 ‘사회 지도층’이라 불리며 일반 서민보다 우월적 지위에 놓여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입만 열면 국방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석연찮은 이유로 자신과 자제들의 병역을 면제받은 자들, 민족의 자존과 역사의 심판을 거론하며 친일 반역 행위와 역사 왜곡을 정당화하는 자들, 수만 년 멀쩡하게 흘러온 강을 콘크리트로 도배질해놓고 친환경을 외치는 자들이 누구인가? 모두 먹물 좀 드신 분들이다. 서울대, 연고대 출신 아닌 교수, 장관, 국회의원이 이젠 좀 나서줘야 할 때이다.

먹물 좀 드신 분들을 지칭할 때 쓰는 먹은 사실 문어나 오징어, 낙지의 그것과는 다르다. 먹(墨)이라고 하여 글씨를 쓸 때 사용하는 서사(書寫) 용구이다. 먹은 그을음과 아교, 향료 등을 배합하여 만들어진다. 먹을 만드는 주요 성분은 극히 작은 탄소 입자로 고대에는 소나무를 태워서 생긴 소나무 그을음을 사용하였으나, 요즘엔 인쇄 잉크나 고무 타이어, 석유 등을 태운 그을음을 사용하기도 한다. 먹을 만들 때는 반드시 아교를 사용해 응고시키는데, 이 아교는 동물의 가죽이나 연골을 삶아낸 즙으로 만들기 때문에 냄새가 좋지 않다. 그래서 먹에 향료를 섞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먹을 보관할 때 습도가 높은 곳에 두면 곰팡이가 생기거나 썩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먹물들도 먹의 성질을 그대로 닮았다는 게 희한할 따름이다. 먹물들은 파벌을 형성해 모여 있거나 고여 있기를 좋아하므로 당연히 썩을 확률이 높다. 원재료가 아교이다 보니, 그들 관계의 끈끈함이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어디 그뿐인가? 돈 되는 일에만 들러붙는 끈적거림이야말로 먹물들의 공통 덕목 중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먹의 특성을 간파한 중국 서진(西晉) 때의 학자 부현(傅玄)이란 자는 일찌감치 근묵자흑(近墨者黑)을 말했느니, 먹물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당연히 자신도 검게 물들게 되므로 먹물을 경계하라는 충고를 후세에 남긴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물전을 망신시키는 대표 어물인 꼴뚜기 또한 덩치는 작을지라도 먹물 좀 품고 있는 놈이렷다. 어쨌거나 어물전이든 인간 사회든 한국 사회 에서는 늘 그놈의 서울대 먹물들이 문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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