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 문화재] 충청남도 기념물 제37호 서혈사지
[우리지역 문화재] 충청남도 기념물 제37호 서혈사지
  • 이훈학 기자
  • 승인 2018.08.07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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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일보 이훈학 기자] 서혈사는 관련 문헌을 찾을 수 없지만 輕部慈恩이 1928년 찾은 연화문 수막새편이 백제 때 것으로 편년 되면서 삼국시대 창건 사찰로 전한다.

또한 남혈사, 동혈사 등과 함께 공주지역 四穴寺 중 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 전기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처음 사명이 언급됐는데 망월산에 사찰이 있다고만 했을 뿐 자세한 내용은 수록되지 않았다.

이후 ‘東國輿地志’나 ‘輿地圖書’ 등 17~18세기 기록에 보이지 않고, ‘梵宇攷’에는 폐사됐다고 하므로 16세기 중반까지는 사찰이 있었으나 그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1859년 ‘公山誌’와 1871년 ‘湖西邑誌’에 수록된 공주목 지도에는 府 서쪽 봉황산 뒤쪽에 사찰이 표기돼 있으나 寺刹條에는 폐사됐다고 하므로 이때까지 사명은 전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17세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古時 ‘西穴寺蒼鷹’에는 ‘人傳 西穴寺 石窟近僧屋~’이라고 했으므로 이 시기에는 석 굴에 수도승만 거주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후 근대기 기록으로는 공주고등보통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輕部慈恩이 서혈사지와 남혈사지를 조사한 현황을 ‘考古學雜誌’ 등에 게재한 것이 전한다. 

그는 1927년~1928년에 걸쳐 서혈사로 추정되는 곳을 답사해 사지와 사지에 남아있던 불상, 그리고 백제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연화문 수막새편 등을 찾았으며, ‘西穴寺’銘 와편을 수습해 이곳을 서혈사로 확정한다. 

또한 ‘西穴’ 이라 불리는 굴과 사지 규모, 지세 등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언급했다. 당시 사지는 3단의 평탄지가 있지만 개간으로 인해 많이 파손됐다고 한다. 

그러나 최상단부인 상단 평탄지는 작은 송림이 돼 개간되는 것을 면한 탓에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십여 개의 초석과 불상 3구가 남아있다고 한다. 불상은 상단 평탄지의 좌측에 석가여래좌상 2구가, 우측에 비로자나불상 1구가 있었다고 하는데 두부를 결실했다고 한다. 

한편 백제 연화문 수막새편은 예전 關野貞가 공주 鳳山 상에서 수습한 수막새와 동일한 양식이라고 하며, 문자기와 중에 ‘三寶’ 銘 기와는 三寶殿이나 三寶堂과 같은 건물의 명칭을 보여 주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輕部慈恩은 1935년 ‘忠南 鄕土誌’ 및 1946년 ‘百濟美術’에서도 석굴을 구비한 백제 사찰로 서혈사를 소개했다.

광복 후 한국 학자들에 의해서도 서혈사가 여러 차례 조사됐는데, 사찰의 창건 시기는 백제 때로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김영배는 1960년 사지에서 발견된 금동 여래입상을 ‘고고미술’에 소개했으며 불상의 조성 시기를 6세기경으로 추정했다.

또한 1965년에는 금당지로 추정되는 상단 평탄지의 민가에서 발견된 초석 7매와 석굴 앞에서 발견된 석탑 지대석 추정재 4매, 그리고 백제 연화문 수막새와 ‘西穴寺’銘 와편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기도 했다. 

이때 발견된 초석 중 1매는 백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1966년 박용진은 앞서 발견된 유물과 문헌 내용 등을 토대로 처음으로 서혈사지와 남혈사지에 대한 연구 논문을 발표한다. 

전반적인 내용은 기조사와 현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서혈사나 남혈사에 있는 석굴로 볼 때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직후에는 당시 사회 경제적 상황에 의해 대규모 사찰을 조영하지 못하고 석굴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이후 백제는 국력을 회복한 후에 석굴 앞에 서혈사와 남혈사를 지었고, 차츰 대통사와 같은 대규모 가람을 조성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1966~1967년에 걸쳐 상단 평탄지 안에 있던 민가에서 다량의 초석이 발견되자 더 이상 민가와 경작지로 인해 사지가 훼손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모아져 1969년에 상단부에 대한 1차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1차 발굴조사 지역은 민가에서 마당을 조성하기 위해 산 쪽을 깎아내다가 7매의 초석이 발견된 부분을 대상으로 했는데, 이곳에서 통일신라 시대 건물지 1동이 발견됐다. 그러나 초석은 원위치를 이탈하고 교란됐기 때문에 국립 공주박물관으로 이동된다.

2차 발굴조사는 1971년에 이뤄졌으며 석탑지와 금당지 등이 발견돼 남향의 일직 선상에 배치된 가람이 밝혀졌다. 

두 번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서혈사는 백제 때 창건돼 조선전기 경에 폐사됐을 것으로 추정됐다.

발굴조사 이후 1982년 사지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37호로 지정됐고, 불상 중 불두가 남아있는 석조 여래좌상 1구는 1989년에 보물 제979호로 지정됐다. 

지금까지 많은 보고서에 서혈사가 소개됐으나 연구 논문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서혈사 관련 연구로는 석굴과 관련한 공간 배치 문제에 대한 것이 있고, 석불상과 백제 막새기와에 대한 연구가 발표됐다. 

특히 조원창은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이동된 석불상 3구가 석굴 및 금당지 북쪽 전각 등 각기 다른 장소에 봉안돼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戶田有二는 2006년 국립공주박물관에 輕部慈恩이 기증한 서혈사지와 신원사 출토 막새를 비교 검토했으며, 서혈사 출토 막새는 한성시대부터 사용하던 제작기법과 동일한 방법으로 제작된 막새이고, 신원사 막새의 와범과 이거나 약간 고쳐서 제작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제시했다.

자료제공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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