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 문화재] 사적 제44호 군수리사지
[우리지역 문화재] 사적 제44호 군수리사지
  • 이훈학 기자
  • 승인 2018.09.11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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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수리사지는 백제 사비기(538~660년) 사찰이지만 문헌이 남아있지 않아 사명과 창건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사지는 조선고적연구회에 의해 1935년에서 1936년에 걸쳐 발굴조사됐며, 이 때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목탑지와 금당, 강당지 등이 밝혀졌다. 

또한 현재 보물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과 금동보살입상을 비롯해 인동문 금동제 광배편, 연화문 수막새, 상자형 전돌 등 다수의 백제시대 유물이 발견돼 백제시대 사찰터로 주목을 받았 다. 

일제강점기 때의 발굴조사 내용은 ‘昭和十一年度 古 蹟調査報告’에 보고되었고, 이 외 ‘扶餘古蹟名勝案內記’ 나 藤島亥治郞의 책 등에도 소개됐다. 

당시 발굴 경위를 살펴보면 1935년도 조선고적연구회의 사업이 시작됐을 때 백제 舊都인 부여 부근이 새롭게 조사 범위에 추가돼 예비 조사를 실시해 여러 곳의 불교유적조사후보지를 확인했는데 이 가운데 군수리사지 부근에서 옛 기와가 다수 수습됐다고 한다. 특히 수습된 기와는 모두 백제양식을 엿볼 수 있고, 유물과 민가 장독대에 사용되고 있던 백제양식의 방형초석 등으로 볼 때 백제시대 건물지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어 발굴조사를 하게 됐다고 한다.

‘扶餘古蹟名勝案內記’에 따르면 1935년 발굴조사되기 전 사지는 경작지와 묘지, 송림이 있었던 곳이며, 예전부터 거대한 방형초석과 문양이 뛰어난 그릇 등이 종종 출토돼 세상의 주목을 끌었다고 한다.

1·2차 발굴 조사를 담당한 石田茂作는 1차 발굴조사 이후 궁전지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2차 조사에서 목탑지와 불상이 출토돼 사지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사찰이 일본 飛鳥時代 사원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발굴 유물이 法隆寺를 비롯한 飛鳥時代의 유물과 공통점이 많기 때문에 일본에 불교가 渡來한 문헌적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후 사지는 1963년에 군수리 19, 19-1번지 등 25필지가 사적 제44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사적으로 지정됐음에도 불구하고 강당지가 사유지에 속해 있었고, 중문지 남쪽과 추정 서회랑지 외곽 등은 사적으로 지정돼 있지 않아 현상변경이 지속되는 등 훼손이 계속되자 추가 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는 군수리사지가 2003년 사역 동쪽에 위치한 궁남지의 종합정비 기본계획의 대상에 포함된 것을 계기로 시작됐으며, 2005년에는 부여군이 사지에 대한 정비·복원 계획을 수립해 국립문화재연구소에 학술발굴조사를 의뢰하게 되면서 재 발굴조사 됐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 발굴조사 보고서에는 개요 정도만 적혀있기 때문에 그동안 사지 축조기법과 기술 등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2011년까지 총 4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사역과 건물지 축조방 법 등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2001년에는 사지의 사적 지정구역이 한 번 조정됐으나 재발굴조사 결과 서방건물지 및 남문지 일원이 지정구역에 포함돼 있지 않아 2008년에 추가 지정됐으며, 지금은 총 3만 2502㎡가 지정된 상태이다.

사지는 1964년 ‘부여군지’나 1998년 ‘문화유적분포지 도’ 등 문화재 관련 조사보고서에 다수 소개돼 있어 시기별 변화 양상과 관련내용을 살필 수 있으며, 일제강점기 때 발굴조사된 내용은 2012년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발간한 일제강점기자료조사보고 6집을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다.

또한 사지와 관련된 연구는 역사·고고학 및 건축학, 미술사학적 측면에서 다양하게 진행됐다.

역사·고 고학 분야는 주로 유구의 축조기법과 유물에 대한 고찰이 많다. 유구와 관련해서는 금당지 기단의 가장자리를 이루고 있는 와적기단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며, 유물에 대 한 연구는 연화문 수막새 및 상자형 전돌의 수급관계, 편년에 관한 연구, 그리고 지두문암키와를 암막새의 초기형 식으로 비정하는 연구가 있다.

건축학 분야는 군수리사지의 가람배치에 대한 연구와 1·2차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동회랑지 외곽 동방기단의 성격 규명에 대한 연구, 그리고 목탑지에 관한 연구 등이 있다. 사지 재발굴이 이뤄지기 전에는 동방기단의 존재로 볼 때 서회랑 서쪽에도 건물지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1탑 3금당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왕흥사지 발굴조사 결과로 볼 때 군 수리사지 동회랑 동쪽 건물지는 금당이 아닌 부속건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또한 사지 창건 시기는 가람배치와 함께 목탑지 심초부의 위치와 출토 막새의 유형 등으로 볼 때 백제 사비기에 조성된 사찰 중 가장 이른 시기였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목탑지 심초석의 위치가 초기에는 지하에 마련됐다가 점차 지상화되며, 심초석 내 사리공이 마련되지 않다가 점차 사리공이 결합된 형식으로 변천하는데, 심초석 안치 위치를 기준으로 보면 군수리사지의 심초석이 지하 가장 깊은 곳에서 확인됐으므로 백제 목탑지 중 가장 빠른 시기에 건립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미술사학적 연구는 목탑지 심초석 상부에 서 출토된 불상이 중심이 돼 왔다. 불상은 출토지가 명 확해 목탑의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 되고 있으며, 조성 연대는 6세기 중반설과 7세기설이 제시되고 있다. 또한 출토 위치상으로 볼 때 불상을 공양구, 지진구, 사리장엄구 등으로 다양하게 보고 있다. 

자료제공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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