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현 칼럼] ‘야망’ 보다 ‘소확행’ 선택한 대한민국 청년세대
[김창현 칼럼] ‘야망’ 보다 ‘소확행’ 선택한 대한민국 청년세대
  • 김창현 서울대학교 지리학 박사
  • 승인 2019.01.14 16: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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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주말 저녁은 항상 가족과 함께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참 많은 드라마를 본방사수했지만, 그 중 ‘서울의 달’(MBC, 1994)처럼 진득하게 빼먹지 않고 보았던 드라마는 드물었던 것 같다.

이 드라마는 제비족 홍식이(한석규 분)와 갓 상경한 춘섭이(최민식 분), 그리고 주인집 딸 영숙(채시라 분)라는 캐릭터로 대도시 서울의 이면을 그렸다. 비록 부자 여성을 노리는 제비족이지만, 홍식이는 항상 입에 ‘보이즈 비 앰비셔스’(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말을 읊고 다닌다.

돌이켜보면, 90년대 상경한 청년들에게는 ‘야망’이 있었던 것 같다. 드라마가 끝나자, 한국 경제는 거짓말처럼 곤두박질을 치기 시작하더니 1997년에는 IMF 외환위기 사태를 맞았다. ‘야망’은 ‘희망고문’이 되었다.

1997년 외환위기는 면도날처럼 한국의 사회문화적 지형을 날카롭게 갈라놓았다. ‘성장의 시대’가 끝나고, ‘불안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이 때부터 젊은이들은 교사, 공무원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기 시작했다.

‘불안의 시대’에 ‘소확행’이라는 키워드가 떠오르는 건, 당연한 현상인지 모르겠다.
소확행이란 무라카미 하루키가 ≪랑게르한스섬의 오후(ランゲルハンス島の午後)≫(1986)라는 수필에서 사용한 용어로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뜻한다.
방금 막 구운 빵은 찢어 먹는다든가, 깨끗하게 각이 잡힌 속옷을 꺼내 입는다든가 하는 데에서 오는 행복이 대표적이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소확행은 우리 일상에 얼마든지 존재한다. 퇴근 후, 할 일을 마치고 세상 모르게 컴퓨터 게임을 한다든가, 주말에 소파에 누워 만화책을 보다가 낮잠에 빠진다든가 하는 것들이다.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배시시 미소가 지어질 만큼 행복한 풍경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소확행은 그만큼 행복이 멀리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부모세대가 살아온 방식, 취직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서, 아이를 키우면서, 돈을 벌면서 살면서 늙어가는 방식이 이제는 사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일단 괜찮은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다. 간신히 취직을 했다 하더라도 결혼이라는 것을 하려면, 연애를 해야 하고(이것 역시 돈과 노력이 든다), 무엇보다 주택이라는 값비싼 물건을 사든지 빌려야 한다(혹은 주택문제가 해결된 배우자를 만나야 한다). 참고로 2018년 기준으로 평수 무관하게 전체 서울의 아파트의 중위가격은 8억 3000만 원이다.
 
90년대 초반의 제비족 홍식이는 그나마 “보이즈 비 앰비셔스”라고 외칠 수 있었는데, 2010년대말 청년세대의 외침은 ‘소확행’이다. 청년세대는 ‘야망’이라 불리는 ‘희망고문’에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희망고문이 된 야망 대신 소확행을 선택한 대한민국 청년세대에게 국가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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