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옥 사유담 이사] 모네는 아르장퇴유, 베퇴이유, 지베르니로 이사했다. 그렇게 모네의 그림은 이사갈 때마다 달라졌다. 직접 보고 그리는 사생화가였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 마지막 정착지 지베르니는 이제 모네의 정원이 되었다. 파리에서 멀지않은 거리와 그림 속에 들어온 듯한 풍광에 언제나 인기가 많은 곳이다. 가야 한다고 마음 먹었다면 늦은 봄, 아직 여름이 완전하게 들어서지 않았을 6월을 추천하겠다.
지베르니의 모네는 행복했다.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부유했고 이미 파리를 넘어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다(인상파의 그림으로는 보기 드물게 화가 생전에 존중을 받았다).
지베르니에서 자포니즘에 한참 빠진 모네는 일본식 정원을 꾸며두고 붓꽃, 창포, 수련을 심고 지켜봤다. 아름다운 나날이었다. 이때 그려진 그림이 '수련연작'이었다. 짐을 싸서 나갈것도 없이 집에서 오전 햇살에 그리고 오후 햇살에 그렸다. 심지어 집 안에서 창을 통해 그리기도 했으니 모네인생이 상팔자였다.
신흥강국이었던 일본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유럽에 영향을 주었다. 유럽은 원색의 화려함과 아기자기하고 다채로운 일본에 빠져버렸다. 모네도 그랬다. 지베르니에서 그린 그림들은 판매보다는 소장을 고집할 만큼 외부인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애써 가꾼 일본식 정원을 비난하는 사람이 성가셨기때문이다. 6명의 정원사와 함께 모네 본인도 노동자처럼 일을 했을 만큼 모네에겐 귀한 곳이었다.
이 곳에 일본인 마츠카타 코지로가 들어선다. 마네가 좋아하는 나폴레옹 와인 한 병을 들고 들어선 일본 남자는 모네의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지베르니의 많은 그림과 모네의 주선으로 유럽의 명작들이 일본으로 속속 들어간다.
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전국이 되면서 유럽에 남은 마츠카타의 예술품 창고들은 불타거나 약탈당했다. 프랑스에 있던 것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압수당했다. 그러나 일본이 누구던가? 프랑스와 최종으로 협상하여 '개인이 사들인 것이니 가지고 오겠다. 그리고 미술관을 짓겠다. 프랑스 건축가가 짓게 하겠다'는 약조를 하고 르코르뷔지에 설계로 도쿄 우에노에 '국립서양화미술관'을 지었다.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컬렉션이 구성되었다. 일본의 청년에게 명화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개인의 꿈이 동양에 서양화 미술관을 만들게 했다. 마츠카타는 가와사키조선소의 초대 사장이었다. 부러워서 죽는 줄 알았다.
내가 포목집 사장이라도 되서 지베르니에 방문해서 한국에 서양미술관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실물을 봐야 설명하고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한국에서는 그림을 가르치기가 쉽지않다. 배웠으니 유럽에 가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가까이 우에노가 있으니 찾아가보라고 말하기는 하는데 도쿄를 가깝다고 말하기엔 또 무리가 있다.
그러나 우에노는 서양그림에 관심이 있다면 꼭 가보길 권한다. 유수에 박물관도 없는 모네의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으니 말이다. 수완좋은 일본은 이렇게 자국에 국립서양미술관을 만들어 두었다. 그것을 보면서 일본의 청년들은 꿈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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