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겨울, 깨달음의 여행
잿빛 겨울, 깨달음의 여행
  • 탄탄스님
  • 승인 2019.01.25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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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자장암 감원, 동국대 강사)
탄탄스님(자장암 감원, 동국대 강사)

겨울이다. 겨울이지만, 겨울 같지도 않은 겨울이다. 두터운 외투도 입어 보지 못하고, 수십 일째 눈 같은 눈도 오지 않는 희뿌연 황사 매연이 지천을 가리는 우울한 잿빛 계절이다.

어디 먼 곳에 여행이라도 잠시 다녀오고 싶지만 일상에 매여 사는 신세이니 쉽지도 않은 일이다. 가까이에 경주가 있고, 신라 천년 대가람 불국사라도 다녀오고 싶지만 빈틈이 없다. 다음 학기 강의록 준비와 연구도서 발간계획이며 사람 만나는 일이 꼭 비즈니스맨처럼 빡빡하게 차 있다.

설악산에도, 백담사도 다녀와야 할 텐데, 책도 좀 사러 서울의 대형 서점에도 가야 하는데, 움직이는 일이 꼭 외국 나가는 일처럼 번잡하다. 양양 바닷가에 있는 낙산사 관음보살도 간절히 그립고, 신흥사의 말사인 건봉사의 큰 법당에서 몇 시간쯤 절절하게 다라니 주력 기도라도 하고프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께서 스승인 휴정 서산대사의 명을 받들어 승병 700여 명을 훈련한 건봉사에서는 조상 천도기도가 영험이 있다.

불가에서는 수행자들을 운수납자(雲水衲子)라고도 한다. 남루한 누더기 옷을 입고 구름처럼 물 흐르듯 돌아다니면서 수행하는 사람들이라는 뜻 일게다. 모든 것이 덧없고, 실체가 없고, 삶이 고통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특정한 무엇에 집착하지 않는 자들을 일컬음이다.

젊은 날부터 자의든 타의든 역마살이 낀 나는 이런 운수납자처럼 살아온 것 같다. 태어나 고향을 등지고 동가숙 서가식하며 살아온 절집의 30여 년 세월이 훌쩍 지나고 있다.

이 시대의 마지막 무애도인이며 대 자유인 무산 오현 스님의 ‘적멸을 위하여’라는 시를 음미해 본다. 그야말로 촌철살인(寸鐵殺人)의 깨우침을 주는 선시이다.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

어차피 한 마리

기는 벌레가 아니더냐

이다음 숲에서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
 

적멸은 불교 용어로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생과 사의 괴로움과 두려움마저도 끊어 버린 상태를 이른다. 다시 말하면 해탈이나 열반의 상태를 말한다. 해탈은 속세의 모든 욕망이나 집착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상태이고, 열반 즉 니르바나는 속세의 모든 욕망과 고뇌를 끊고 해탈한 최고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불가의 수행자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고행의 목표가 해탈과 열반이며 적멸위락(寂滅爲樂)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열반의 경지를 즐기는 것을 말한다.

삶의 즐거움을 알면 죽음의 즐거움도 알까? 사는 줄거움은 도대체 무엇인가? 세속적인 욕망이나 집착을 버리고 작은 것에 만족하면서 사는 것이라는데, 역설적이지만 필자는 익히 모든 게 덧없다는 걸 알면서도 유한한 삶이지만 즐거우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한시적으로 주어진 짧은 시간을 번뇌로 낭비하는 것은 허망하다는 것을 익히 알기에, 생명 있는 것들이 다 거쳐야 할 죽음 또한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차라리 속 편하다.

이 세상에서 나만 죽는 게 아니지 않은가? 모든 존재는 때가 되면 다 사라진다는 것, 생로병사가 모든 인간이 겪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면, 생과 사를 분별할 필요도 없다. 옛적에 장자는 자기 아내의 주검 앞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고 하지 않는가. 삶과 죽음이 서로 다른 게 아니고 하나라고 생각했으니 그런 무애행을 할 수 있었으리라.

며칠 전 산행을 하다가 오어사 큰 절에 있는 수많은 부도들을 어루만지다가는 불현듯 서산대사께서 입적하기 전에 하신 게송이 생각났다.
 

삶은 한 조각 뜬구름 일어남이요
生也一片浮雲起

죽음은 한 조각 뜬구름이 사라짐이니
死也一片浮雲滅

뜬구름이 본래 실체가 없듯
浮雲自體本無實

삶과 죽음도 실체 없기는 마찬가지라
生死去來亦如然

 

세월이 점점 흐를수록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 빈번해진다. 아마도 중년의 사람들이 여행 중에 절을 찾는 이유 중 하나도 그러한 연유와 관련이 있으리라,

전국의 절 어디든 주중에 가면 한적하기만 하다. 절간 한 구석에 앉아 세속적인 욕구 충족밖에 몰랐던 지난 삶을 반성하고, 내가 누구인지도 다시 찾아보고, 또 앞으로 남은 세월을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말년이 될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이 잿빛 계절에 휴일이면 국토 각처에 도량으로 힐링 여행도 떠나 볼 요량이다.

도량을 둘러보면 삶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일깨워 주는 풍경소리가 있다. 고요히 귀 기울여 볼 일이며, 불교가 국교는 아니어도 이 나라의 곳곳의 산림이며 각처의 도량은 민초들에게 훌륭한 깨달음의 여행지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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