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김복동 할머니 편안한 영면을 기원한다
[사설] 김복동 할머니 편안한 영면을 기원한다
  • 충남일보
  • 승인 2019.01.31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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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간에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갈수록 꼬이고 있어 안타깝다. 일본은 강제징용 배상판결과 초계기 갈등까지 겹치면서 한·일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게다가 독도 영유권 문제까지 다시 등장하려는 조짐이다.

일본 정부의 속 좁은 처신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역사 앞에 씻지 못할 잘못을 저지르고도 진정성 있는 사과 한마디가 그렇게 어렵단 말인가. 그런 상황에서 아흔네 살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상징이던 김복동 할머니가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고 오늘 천안 망향의 동산에 묻혔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끝까지 싸워 달라”는 게 세상에 남긴 마지막 유언였다. 김 할머니는 위안부 문제 해결에 온몸을 내던지고도 끝내 원하는 결과를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날 또 다른 피해자인 이모 할머니도 세상을 떠남으로써 이제 위안부 피해자 생존자는 23명으로 줄어 들었다. 일본 정부로서도 당사자들에 대한 사죄의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남아 있는 피해자들도 대부분이 고령임을 감안하면 일본 정부가 피해자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 나서기는 커녕 시간만 가길 기다리는 듯한 행태를 보여 매우 유감이다.

더 늦어지기 전에 일본 정부의 진정 어린 반성의 목소리를 기대한다. 김 할머니는 피해자이면서도 어느 유명인 못지않게 커다란 흔적을 남기고  떠났다.
그는 1992년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스스로 공개한 게 그 시발점이 됐다.

이듬해에는 세계인권대회에서 관련 사실을 생생하게 증언했고 그 뒤로도 국내외에서 일본의 전시 때 만행을 규탄하는 일에 앞장섰다. 또 전시 때 성폭력 피해자를 돕는 ‘나비기금’ 설립에도 적잖은 기여를 했다.

이후 미국, 일본, 유럽 등에서 피해 사실을 증언하기도 했다. 또 본인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어 분쟁지역 아동과 전쟁 중 성폭력 피해 여성을 돕는 인권활동에 매진하기도 했다.
김 할머니는 15살이던 1940년 일본군에게 속아 위안부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1948년 8월15일 광복 후 8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 일로 결혼과 출산도 포기하고 남은 일생을 여성인권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김 할머니는 국제사회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고 전시 때 성폭력 피해의 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으로 국제 여론을 이끌어 내기는데 헌신했다.

때문에 국경을 넘어서 전시 때 성폭력 피해자들의 초국적인 연대는 이 세상을 평화로 만들고 전시 때 성폭력 피해의 재발을 막는 데 새로운 희망을 안겨 주는데 공을 세웠다.
때문에 김 할머니를 떠나보내며 더욱 아쉬워하는 이유다.

한국인들의 가슴속에서 김 할머니의 유언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사죄와 배상은 끝내 받지 못하고 눈을 감은 김 할머니의 편안한 영면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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