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의 스페인 문화 프리즘] 시간을 배우는 곳, 론다
[스티브의 스페인 문화 프리즘] 시간을 배우는 곳, 론다
  • 자유기고가 김덕현 Steve
  • 승인 2019.03.13 21: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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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정열을 고스란히 간직한 안달루시아 지방을 다니다 보면, 바쁜 일정 중에도 꼭 가는 곳이 있다. 바로 협곡마을, 론다. 불과 3만 5천여 명에 지나지 않는 작디 작은 시골마을이다. 이곳 주민보다 관광객 수가 몇 배에 달할 정도다. 이곳에선 유서깊은 역사나 세계문화유산 답사처럼 머리를 한껏 채울 지식 대신, 자연 그대로의 풍광과 절경인 다리를 보며, 복잡했던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보는 곳이다.

론다는 안달루시아 사람들이 시간을 어떻게 대하는 지를 잘 보여준다. 바로 Sin prisa pero sin pausa (씬 쁘리사 뻬로 씬 빠우사) 라는 말. '서두르지 않되 꾸준히' 라는 뜻이다. 이곳은 언제든 찾아가도 거의 변하는 게 없다. 풍경도, 건물도, 사람도 그 때 내가 와서 본 모습 그대로다.

생소한 이름의 론다는 스페인 투우의 본고장으로 유명하다.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 뿐만 아니라 현대 투우방식도 이곳 론다에서 탄생했다. 론다식 투우가 현대 투우의 전형으로 자리잡기 전, 투우사는 말을 타고 말 잔등 위에서만 경기를 치뤘다. 그러다 이 고장 출신의 전설적인 투우사 뻬드로 로메로는 경기 스타일을 바꾸었고, 그 시도는 이제 투우의 고전이 되었다. 로메로는 얼마나 유명세를 떨쳤는지 프란시스코 고야는 그의 초상화를 그렸고,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소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The Sun Also Rises'에서 이 투우사의 이름을 그대로 빌려왔을 정도였다. 이젠 투우도 투우장도 다 옛 명성만 지닌 채 그 때만큼의 인기는 얻지 못하지만, 론다 투우장은 매해 9월 초면 어김없이 마을축제로 투우를 열어 각 지방에서 몰려든 인파를 맞이한다.

미국인 작가 헤밍웨이는 스페인 사랑이 남달라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파 의용군으로 참전할 정도였다.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1939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를 집필한다. 이후 1943년엔 동일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중간에 인터미션까지 있는 이 영화에서 종은 끝내 울리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작품 제목은 성당의 종이 아닌 영국 성공회 신부 존 던이 쓴 '묵상 17'이 모티브가 되었기 때문이다(작품을 안 보고 영화만 본 사람들은 종종 속곤 한다).

헤밍웨이는 문명세계를 속임수로 보았다. 물질문명이 절정에 달한 미국보다는 광활한 풍광을 지니고 황량하기까지 했던 스페인이 그에게는 오히려 순수의 세계로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 시골 길이 무에 그리 좋아 매일 산책했기에 아예 '헤밍웨이의 산책로 Paseo de E. Hemingway'라는 길 이름 마저 있을 정도일까.

짧은 산책길을 따라가고 나면 높이가 무려 100미터가 넘는 다리, 뿌엔떼 누에보 (Puente Nuevo, 새로운 다리)가 나온다. 걸을 때는 전혀 모르는데 걷고 나서 뒤돌아 보면 똬! 하고 펼쳐지는 장관에 오금이 저리고 입이 안 다물어진다. 강 때문에 지역이 둘로 나뉘어 장애를 겪다가 18세기에 와서야 3개의 다리를 놓으면서 소통의 장을 마련했다. 그 중 가장 마지막에 완공된 다리는 '새로운 다리'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정작 다리를 건너가 보는 우리로선 켜켜이 역사가 묻은 “오래된 다리”라는 건 안비밀로 해두자).

날씨 좋고 시간이 허락된다면 누에보 다리 건너 구 시가지 오른편 아래로 내려가 보자. 스페인에 찾아오는 수많은 사진작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장소를 만나 한껏 기분 내며 앨범에 담아볼 수 있다.

그보다 더 좋은 건 따사로운 볕을 쬐며 기분 좋은 졸음이 몰려올 때 Cortado (꼬르따도, 에스프레소에 우유를 살짝 탄 적은 양의 라떼) 한 잔을 주문하고 시간이 주는 여유를 배울 때가 아닐까. Sin prisa pero sin pausa로 서두르지 않되 꾸준히 이어가는 현지인의 모습 속에 그동안 왜 바쁜 지도 모른 채 그저 숨가쁘게만 살아왔던 내 모습을 잠시 내려놓아 보았음 좋겠다.

굳이 내가 헤밍웨이가 될 필요는 없다. 혼자 또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는 이 여행의 의미를 몇 줄 적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론다는 그 가치를 빛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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