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의 스페인 문화 프리즘] 시간의 온도
[스티브의 스페인 문화 프리즘] 시간의 온도
  • 자유기고가 김덕현 Steve
  • 승인 2019.04.12 1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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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브라에서 시에스타를 즐기는 현지인.
알람브라에서 시에스타를 즐기는 현지인.

[자유기고가 김덕현 Steve] 내가 기억하는 한국, 특히나 서울의 모습은 사람들이 거의 항상 뛰어 다닌다는 것이다. 정장 구두를 신고도 뛰고, 짧은 치마를 입고도 뛰며,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도 성큼성큼 뛴다. 초록불이면 빨간불 바뀌기 전에 가야 하니까 뛰고, 빨간불이면 빨간불이라 위험하니까 뛰었다. 학생 때는 가만히 있는 게 좀이 쑤시다보니 걷기 보다는 뛰는 게 자연스러웠다. 사무실에선 기하급수적으로 쌓여가는 일 때문에 같은 층에서도 경보하듯 다녔다. 거리는 빡빡한 차량 틈을 귀신같이 비집고 내달리는 퀵서비스의 오토바이 소리로 요란했다.

압축적으로 이뤄낸 성공과 성장 속에 여유와 느림의 미학은 사치스런 단어가 되었고, 조상들의 유유자적한 삶은 드라마나 판타지에서만 가능한 일로 남았다. 바쁜 삶에서 느림은 게으름으로 변질되기 일쑤이고 심지어 죄악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쉴 틈 없이 돌아가는 바쁨은 그래서 뜨겁고 열기 가득한 인생으로도 그려진다.

유럽, 아니 스페인은 어떨까? 스페인 하면 일단 시에스타, 낮잠이 떠오른다. 게으름을 권하는 사회인 걸까?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왜 스페인에선 시에스타가 나오게 되었을까? 'Siesta'는 라틴어 'sexta'에서 나왔다. 6번째란 의미이다.

스페인은 일조량이 길다 보니 하루를 길게 보내는 편이다. 동방의 어느 나라처럼 새벽같이 일어나 하루를 가열차게 살기 보다는 늦게 시작해서 늦게 마친다. 식사도 하루 삼시세끼가 아닌 다섯끼를 먹는다. 사무실에선 보통 오전 9시에 출근하니, 9시를 기준으로 6번째 시간은 오후 3시가 된다. 그 때가 점심 먹고 잠시 충전의 기회를 가지는 시간, 시에스타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와 같은 대도시야 시에스타는 사전에나 존재하는 단어가 되었지만, 지방에서는 지금도 관공서, 상점 할 거 없이 점심 시간에 이어 쉬는 곳이 대다수다.

구엘공원에서 시에스타를 즐기는 현지인.
구엘공원에서 시에스타를 즐기는 현지인.

왜 낮잠을 잘까? 스페인의 여름은 생각보다 길다. 그리고 정말 뜨겁다. 후텁지근 숨이 막히는 더위가 아니라 머리에서 증기가 오르고 피부가 익다 못해 타버릴 것만 같은 열기다. 이렇게 뜨거운 한여름의 대낮시간에 밖에 나와 근면성실히 일한다는 건 자살행위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낮의 이글거리는 열기가 가라앉을 무렵인 오후 네다섯시 정도에 나와 다시 일을 이어가는 게 이들 조상의 삶의 방식이었으리라. 스페인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처럼 지중해를 끼고 있는 나라들과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중남미 국가에서도 시에스타는 당연한 행해야 하는 과제였다.

농업을 기반으로 한 중세에서 낮잠은 종교의 엄격한 규율 하에서도 허용이 되었다. 시에스타를 죄악시 여긴 것은 산업화 이후였다. 산업화 당시 유럽의 노동강도는 OECD 국가 중 최장노동시간 2위를 기록하는 우리나라 못지않게 대단한 것이어서, 낮잠은 혐오의 대상으로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근로자의 복지에 대한 담론이 오랜 노력 가운데 꾸준히 형성 되면서 인식이 많이 완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에스타는 전세계적 추세인 효율성과 생산성의 계산을 피해가기는 어려웠다. 결국 2005년 12월 스페인 관공서는 시에스타를 폐지하기 시작했다. 상점들 또한 내가 시에스타를 취하는 동안 경쟁업체들은 부지런히 일을 하니, 하나 둘 시에스타 시간을 없앴다.

시에스타 표지판: 오후3시부터 6시까지 시에스타 시간을 존중해 주세요.
시에스타 표지판: 오후3시부터 6시까지 시에스타 시간을 존중해 주세요.

그런데 세상사 돌고 도는 것인가. 최근에 와서는 과학적 연구를 통해 다시 시에스타의 효과가 밝혀졌다. 점심식사 이후 억지로 졸음을 참아가며 업무를 보는 것보다 잠깐의 낮잠이 집중력을 높여 오히려 업무의 효율을 높이고 생산성을 증대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심장마비 예방과 기억력 증진에도 도움이 되는 것으로 밝혀졌으니, 이 정도라면 효율에 목숨을 거는 회사들마다 시에스타를 적극 권장해야 되는게 아닐까.

반고흐, 시에스타.
반고흐, 시에스타.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일을 하면 쉼이 필요하다. 쉬어야 다음을 이어갈 수 있다. 지금까지 시간을 뜨겁게 보내왔으니 잠시 식혀보면 좋겠다. 그래서 한 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당신의 삶을 더 값지게 만들어 보면 어떨까. 스페인의 시에스타가 오늘도 치열하게 살아가는 당신에게 누려질 권리가 되길 소망해 본다.

김덕현 Steve
김덕현 St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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