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친구’라는 영화에서 교사가 학생을 체벌하는 장면에서 “느그 아버지 뭐 하시노?” 했던 대사가 유행어였다. 체벌도 인권유린 이었지만, 부모의 직업을 묻는 것도 교육자의 자질부족과 교육행정의 공정성을 잃게 하는 이유가 명백하다.
학생의 뺨을 세차게 때리고 학생 아버지 직업을 묻고 무자비하던 체벌장면을 희화화하여 인상 깊었던 그 영화의 한 장면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수준 떨어지는 그러한 교사는 형사 입건될 문제이겠지만, 지난 권위주의 사회에서는 태반이 그런 교사들이 존재하였다.
부모의 직업을 묻고는 알아서 기거나 체벌의 강도가 차별되던 그러한 시대를 살아온 세대는 그 영화 속의 선생이 자신들의 선생이었음을 추억하며 가슴 아프고 씁쓸한 공감을 하기도 하였을 터이다.
2009년 고려대가 운영했던 ‘세계선도인재전형’에 붙인 별명이 ‘아버지 뭐 하시노’였다고 한다.
이제는 그 별칭을 모르는 사람 찾기가 더 어렵지만, 그해 이 전형에 합격했던 어느 학생의 아버지 중 한 명이 오늘 법무부 장관 후보자라고 한다.
보도에 따르면 그의 딸은 외고 재학 중 병리학 논문의 제1저자, 조류학 논문의 제3저자로 등재됐으며, 서울대 공익인권법센터가 주최한 콘퍼런스에 인턴으로 참가했다고 한다.
고3 여름방학 때 한국물리학회가 주최한 경시대회에 참가해 장려상도 받았으며, 이 정도의 스펙만으로도 세계를 선도할 ‘천재’라 불리기 충분한 스펙이고도 남지만, 당시 서울시내엔 그 같은 천재들이 적지 않았다.
청년들의 스펙 쌓기에 몰두하게 된 건 2008년부터 도입된 입학사정관제도 때문이다. 수능 내신 성적이 좋은 학생뿐 아니라 물리학이나 생물학 등 이공계 과목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거나 리더십이나 봉사정신 등 다양한 재주와 재능을 가진 학생을 선발하겠다는 취지로 도입 되었으니, 문제의 세계선도인재전형도 입학사정관제의 하나였다.
그 취지는 좋았다고 하지만 일부 학생, 특히 상류층에 태어나 힘 있는 아버지, ‘빽’을 가진 학생들과 소위 서울의 대치동 학원가로 불리는 사교육계가 밀약을 맺으면서 아버지의 재력과 인맥을 바탕으로 다양한 재능을 ‘창조’하는 사례가 속출하였으며, 명문대 입시 전형에서의 불공정한 게임룰은 이미 대세였다.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 지난 정부는 입학사정관제를 ‘학생부종합’(학종) 전형으로 바꾸었다. 이는 법무부장관 후보 같은 편법의 재능창조 사례를 막기 위해 학교 밖 외부기관에서 쓴 논문이나 인턴 활동 등을 학생종합부에 기재하는 것도 틀어막기 위함 이었지만, 정작 그 실효성은 어떠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사교육 1번지 강남 대치동과 부모들은 이후에 바뀐 환경에도 쉽게 적응했으리라고 본다. 입학사정관제든 학종이든 스펙 싸움이라는 점에서 그 본질은 동일하다고 하겠다. 학교 밖에서 만들어오는 걸 금지하면 학교 안에서 더 은밀하게 만드는 방법을 찾으면 그만 아니겠는가.
서울 사대문안의 명문대를 목표한다면 거기에 맞는 스펙을 일관되게 추구해야 한다는데, 이를 ‘스토리’라고 한다. 입시업계에선 발 빠르게 고1 때부터 컨설턴트가 붙어 스토리를 만들어주는 걸 ‘올인(all-in) 프로그램’이라고 부르는데 올인 프로그램에 ‘입학’하면 통상 매년 수백만 원부터 많게는 수천만 원까지 컨설턴트에게 지불해야 한다고 하니 수저론이 난무하는 이유이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부의 대물림, 고소득층 부모를 둔 상류사회, 그들만의 리그를 바라보는 흙수저 서민 자제들 상대적 박탈감과 분노를 십분 이해하고도 남는다.
대학의 박사 과정을 수료 하거나 학위를 취득하고도 학회지나 논문, 책을 쓰거나 관련 기관의 인턴이 되는 길도 요원하기만 한데, 고위층 부모나 교수나 의사 변호사 또는 국회의원 자제 장관 후보쯤 되는 부모에게는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일이어서, 이미 고등학교 때 부터 명망있는 국제 학술지에 이름을 올리고 대학의 연구소에 대형로펌에 인턴이 되는 길에 금 수저 학생의 아버지 사회 관계망과 인맥, 학벌이 동원 된다고 하니 개천에서 용 나기는 애초에 틀려먹은 사회이다.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도 “너 몇 평 집에 살고 있느냐?”며 살고 있는 평수가 작거나 임대 주택일 경우 놀아주지 않는 등 빈부의 격차를 유치원 때부터 논한다는 사회가 제대로 굴러 가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공정이니 정의를 입으로만, 캠페인 구호로만 부르짖지 말고 사회의 기득권층이나 가진 자들이 이제라도 양심껏 하루속히 위선을 내려놓고 공정한 경쟁을 실현하고자, 또한 교육행정의 적폐청산의 의지가 있을 때에만 백년대계인 교육이 되살아 날 수 있다고 본다.
이천오백 년 전 붓다는 계급사회였던 시절에도 이미 이를 초월하여 제자를 가르침에 출신성분을 따지지 않고 평등하게 양성 하여 인격완성(인성)이 교육의 최대 정점임을 설파해 오지 않았던가.
계급과 계층이 대물림 되는 그런 세상은 희망이 있을 수 없으며, ‘느그 아버지 직업’이 자식의 스펙이 되는 세상의 불공정한 시스템은 하루 속히 멈춰져야 공정한 적폐청산이 이루어진다. 법 앞에 만민은 평등한 이치 아니겠는가.
더 가진 자들이여! 스스로 좀 더 겸손 해지고, 지닌 것을 나누려는 넓은 마음을 지니는 것이 이를테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아니겠는가. 가지고 지닌 자들의 모범을 학수고대(鶴首苦待)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