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죽비소리
[기고] 죽비소리
  • 탄탄스님
  • 승인 2020.02.06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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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스님(용인대 객원교수)

참선으로 자신의 본성을 구명하여 깨달음의 묘경(妙境)을 터득하는 선종(禪宗)은 부처 깨달음의 교설(敎說) 외에 이심전심으로 중생의 마음에 전하는 것을 종지(宗旨)로 한다. 양나라 때 달마 대사가 중국에 전하였으며 신라 중엽에 이 땅에도 전해져 구산선문이 성립되었다.

송(宋)나라의 도언(道彦)은 그의 저서 《전등록(傳燈錄)》에 석가(釋迦) 이래 조사(祖師)들의 법맥(法脈) 계통과 수많은 법어(法語)를 기록하여 붓다께서 제자인 가섭(迦葉)에게 말이 아닌 마음으로 불교의 진수(眞髓)를 전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무문관(無門關)》, 《육조단경(六祖壇經)》에도 동일한 이야기가 전해지며 특히 송나라의 사문 보제(普濟)의 《오등회원(五燈會元)》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석가 세존(世尊)이 제자들을 영취산(靈鷲山)에 모아놓고 설법을 하였다. 그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 세존은 손가락으로 연꽃 한 송이를 말없이 집어 들고(拈華) 약간 비틀어 보였다. 제자들은 세존의 그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가섭만이 그 뜻을 깨닫고 빙그레 웃었다(微笑). 그제야 세존도 빙그레 웃으며 가섭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는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이 있다. 이것을 너에게 주마.”

이렇게 하여 불교의 진수는 가섭에게 전해졌으며 이심전심이라는 말은 글이 아닌 마음과 마음으로 전하였다고 한데서 유래한다. 불교의 심오한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말이며 현대의 ‘텔레파시가 통한다’와 유사한 의미이기도 하다.

깨달음은 언어로 전해진 것이 아닌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진 것이라는 요지이며 지극히 말을 삼가는 선가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보아, 중생이 본래 지니고 있는 불성에 눈떠, 대립과 부정을 상징하는 문자를 뛰어넘어 초월의 세계로 지향한다.”

번쇄한 교리를 일삼은 교종(敎宗)의 종파들이 소홀히 다루어온 부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본래 의미를 따로 전하는 4구의 구절은 선종의 세계관을 정리한다. 이것이 4구표방(四句標榜)인데, 4구가 처음부터 함께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시간면에서 따져보아 교외별전을 제외한 3구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선종에 관한 논의에 그대로 다루어져도 무방하다.

선방에서는 의사소통이나 수행자를 지도할 때 또는 신호에 사용되는 도구가 있다. 목탁과 같이 대중을 결집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죽비이다. 죽비자(竹璉子)라고도 하는데, 약 40∼50㎝ 길이 대나무의 3분의 2쯤은 가운데를 타서 두 쪽으로 갈라지게 하고 3분의 1은 그대로 두어 자루로 만든 형태가 보통이다.

그 기원은 자세하지 않으나 중국의 선림(禪林)에서 유래되어 널리 보급된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이를 사용할 때는 자루를 오른손에 쥐고, 갈라진 부분을 왼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대중의 수행을 지도한다. 좌선할 때 입선(入禪)과 방선(放禪)의 신호로 사용됨은 물론, 공양할 때도 죽비의 소리에 따라 모든 대중들이 행동을 통일하게 되어 있다.

발우공양을 행할 때 오관게(五觀偈)의 게송을 외울 때는 죽비를 한번 치며, 발우를 펼 때와 공양을 시작하고 마칠 때에는 세 번 울린다. 중간에 숭늉을 돌리는 죽비 소리는 두 번이지만 찬상을 물리고 청수를 걷는 소리는 한 번이다.

죽비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선방(禪房)에서나 강원(講院)에서는 제한되어 있다. 부처님께 공양을 올릴 시에는 대중이 다 함께 예배를 올릴 수 있도록 큰방의 부처님을 시봉하는 부전스님의 죽비 소리로써 함께 절을 한다.

선가에서 수행자의 졸음이나 자세 등을 지도하는 약 2m 정도의 큰 죽비도 있는데, 이를 장군죽비라고도 한다. 경책사(警策師)가 이것을 가지고서 어깨 부분을 쳐서 소리를 내어 경책하는데 사용한다.

길고 납작한 나무의 가운데 부분을 파내어 양쪽으로 갈라지게 하여 서로 부딪히면서 소리를 내도록 만들었다. 손잡이는 모가 없이 둥글게 처리되어 잡기 편하도록 하였다. 손잡이와 몸통의 경계 부분과 꼭지 부분에는 각각 구형(求刑)의 나무를 다각면(多角面)으로 깎아 장식하고, 꼭지 아랫부분에 지승(紙繩) 끈을 묶어 걸어둘 수 있도록 하였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의 결점이나 단점만을 애써서 보려는 이들이 간혹 있다.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눈에 티만 보려는 행위이다. 남의 장점을 찾아내 칭찬하기 보다는 타인을 비방하거나 폄훼하는 일에 적극적인 사이비 언론도 그런 부류일 것이다.

언론이라고 하기 보다 증권가에 중구난방으로 마구 뿌려지는 찌라시 수준의 가짜뉴스가 난무한다. 미담은 거의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온통 거북할 지경으로 남 잘못이나 사생활을 떠드는 꼴이다.

‘취모구자(吹毛求疵)’라는 말이 있다. 터럭을 불어서 작은 허물을 찾아낸다는 뜻이다. 짐승의 몸에 난 흠은 털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입으로 불어서 털을 헤치고 흠을 찾아내는 것이니 남의 허물을 억지로 들추는 일을 말한다.

중국의 철학자 가운데 법의 중요성을 주장한 한비자의 “군자는 터럭을 불어서 남의 허물을 찾지 않는다”는 말에서 나왔다. 작은 허물도 없는 완벽한 사람은 오히려 인간적인 매력이 없어서 가까이 다가서기 어렵다. 어느 누구나 작은 결점은 지니고 있다. 남의 장점보다 결점이 먼저 보이는 것은 가랑잎이 솔잎더러 바스락거린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붓다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신다.

“남의 허물을 찾아내어 항상 불평을 품는 사람은 번뇌의 때가 점점 자라며 그의 번뇌는 계속 불어난다.”

남의 허물을 찾기 전에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도 깨달음을 향해 가는 길이다.

세상은 사람과 사람이 맺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니 곧 인간관계다. 결(結)이란 끈으로 매는 것이고 해(解)는 묶은 끈을 푼다는 것인데, 사람의 일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사에 이리저리 얽히기(結) 시작하지만 죽을 때에는 그 모든 것을 풀고(解之) 가야 하는 법이다.

세상사(世上事) 관계 속에서 우리네가 살아가는 사이사이에 이리저리 얽히고 설키어 있으니, 너와 내가 얽히고 상하가 얽히고 과거와 현재가 얽혀 있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關係(관계)라는 단어에도 ‘실사(絲)’가 들어 있듯이 사람들은 이러한 끈으로 서로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인연(因緣)이란 말로 표현해도 좋을 듯싶다.

선하게 얽혀 있으면 무슨 문제가 있을까마는 만약 원한으로 악하게 맺혀 있다면 어찌 감당하랴?

인간은 사회를 떠나서 살 수 없듯이 가족 관계도 집도 미시적으로는 사회이며, 친구들과의 만남도 사회이고, 이웃이나 마을, 복지관이나 절도 우리에게는 사회이다. 사회에서도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철저한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절에 다니는 이들도 간혹 잘난 체하고 뽐내며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자신의 도만 높다고 하는 불자도 있기 마련이다. 뿐만아니라 분위기를 흐리고 헛소문을 만들어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기도 하고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연못을 흐리는 것과 같이 마구니 짓이 일상인 이도 있다. 그런 사람의 곁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마주치면 거북살스럽고 만나지면 증오스러운 사람이 되어서야 될까 싶다. 종교인, 법조인, 정치인, 언론인, 연예인, 어떠한 일에 종사를 하더라도 마른 대지를 촉촉하게 적셔주는 봄비 같은 이가 되어야 한다. 겨울 가뭄을 해갈해주는 봄비처럼 만나면 반가운 이.

어느 날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자칭 기자라는 이를 처참히 응징하고픈 적도 있다. 정론을 지향하는 것이 종교계 언론의 일이건만 불교계에는 죽비소리처럼 깨우침보다 대안도 복안도 없는 비판, 비난 일색인 짜증스러운 저질 찌라시들이 물색없이 설쳐대는 꼴들은 극혐스러울 뿐이며 미혹한 사이비 언론은 장군 죽비로 마구 쳐 깨우침을 주고 싶을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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