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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치마 차림으로 쫓겨난 군주 부인, 그리셀다 (8)
  • 서규석 박사
  • 승인 2007.03.28 2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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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쿠퍼의 그리셀다.
▲남편의 잔인한 인내 시험

군주는 새로 맞이하는 신부가 그리셀다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가장 겸손한 투로 대답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는 그리셀다를 가까이 오게 하여 곁에 앉히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셀다 부인, 마침내 긴 세월동안 참고 견뎌온 당신의 인내가 결실을 맺게 되었소.
나를 잔인하고 사악하고 무례한 남자라고 비난하는 자들에게 이제 밝혀야할 일이 있소.
사실은 내가 당신에게 참된 아내의 도를 가르치고 어느 누가 되었든 아내를 맞으면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가르치려고, 그리고 당신과 부부로 살아가는 동안 오랫동안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의도적으로 이런 일을 꾸민 것을 이제 밝혀야 할 때가 된 것이오”
“사실 나는 당신을 아내로 맞이할 때부터 우리들 사이에 영원한 평화가 있을 것인가 하고 걱정했었소. 그래서 그 것을 확인하려고 당신이 알다시피 세 번의 거칠고 불쾌한 말로 당신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었던 것이오.
그러나 이제는 오히려 내 영혼이 구원받은 것처럼 평온함을 느끼오. 이제 잠시후면 그대에게 위로가 될만한 것을 주겠소. 그리고 전에 그대가 고통받은 것을 달콤하게 복원시키도록 하겠소”
“나의 아름답고 사랑스런 그리셀다, 당신이 내 신부로 알고 있는 여인은 당신의 딸이고 그 동생은 우리의 아들이오. 자, 우리 자식으로서 받으시오.
애들은 당신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내가 잔혹하게 죽인 것으로 믿고 있었던 우리의 친자식이오. 난 당신의 군주이며 남편이고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고 있소.
그리고 나만큼 자신의 아내를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자는 없을 것이라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소”

▲품위있는 군주 부인으로 복귀한 그리셀다

말을 마친 군주는 그리셀다를 끌어안고 무한정 달콤한 키스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기쁨에 넘쳐 강물처럼 눈물을 쏟아내며 울고 있는 그녀를 껴안고, 그리고 크게 놀라고 있는 딸과 아들을 껴안으며 함께 앉았습니다.
그녀는 감정에 복받쳐 자식들을 포옹하고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도 깜짝 놀랐습니다.
귀족 부인들은 매우 기뻐하며 그리셀다를 데리고 그녀의 옛날 방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축복의 인사를 하고 초라한 옷 대신에 예전에 입었던 훌륭한 의복을 입혔습니다.
초라한 옷을 입었더라도 그렇지만 그리셀다는 품위 있는 군주의 부인이 되어 다시 홀에 나타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환호하며 군주 부부와 자녀들과 함께 축하하면서 성대한 잔치를 몇 개월 동안이나 베풀었습니다.
사람들은 군주가 부인에게 행한 시험이 잔인하고 매정한 짓이라고 수군거리는 경우도 더러는 있었습니다만, 대부분은 매우 총명한 사람이라고 칭송하고 또 그리셀다는 어느 누구보다도 현명한 여자라고 치켜세웠습니다.
파나고 백작은 며칠 뒤 볼로냐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군주는 잔누쿨라를 궁전으로 불러들여 지금까지의 농사일을 그만두게 하고 군주의 장인으로서 신분을 높여주어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살다가 여생을 마쳤습니다.
군주는 얼마 후 딸을 훌륭한 가문으로 출가시키고 그리셀다를 항상 사랑하고 존경하며 살았습니다.
자 지금까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누추한 오막살이집에서 태어나도 왕실에서 태어난 것처럼 신성하고 위대한 영혼이 나올 수 있으며, 또 왕족이라도 돼지나 키우는 자와 같은 영혼을 갖는 자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굽힐 줄 모르는 영혼을 가진 여인이 그리셀다 이외에 누가 또 있겠습니까?
군주가 그리셀다를 속치마 바람으로 쫓아냈을 때 그녀가 벌거벗은 몸으로 추운 거리를 걷기보다 차라리 다른 남자에게 몸을 맡겼다 해도 그녀를 탓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셀다의 이야기는 연민을 자아낼 정도로 우울하다. 이 글이 쓰일 당시의 중세 작가들은 외설스런 이야기, 기사도와 사랑, 종교문학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사생활 등 사적인 영역에 대해서 감입적 관점에서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방법을 즐겨 사용하였다.
13세기를 전후로 한 이탈리아 문학에서도 반(anti) 여성적인 경향이 두드러진다.
종교적 영향력과 중세의 기사도적 가치가 정점에 올라있던 이 시기에 남성의 권위는 여성의 물질적인 과시성향, 허영과 치장을 강조하는 여성의 종속적 이미지 위에 서게 되었다.
이 그리셀다의 이야기는 1395년부터 희극으로 발전하여 16세기와 17세기에는 ‘인내심 있는 그리셀의 신화(The History of Patient Grisel, 1619)’등으로 출간되고 헨리 7세 때에는 희곡이라는 장르로 편입되기에 이르렀다.
그리셀다는 역설적이지만 현대여성들에게는 극복해야 할 과제로서 이해된다.
교회로부터 결혼성사(聖事)를 허락 받아야만 정식으로 결혼이 이루어졌던 시기에도 살루초 군주가 교황의 가짜 이혼서류를 위조하여 인내심 강한 그리셀다를 속치마 바람으로 내쫓은 것은 남성 문화의 단면은 물론이고 가학적이다 못해 용서받지 못할 남성일지라도 인내하는 자에게 신의 은총이 내린다는 역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서규석 씨는 중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서 사회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자치경영개발원에 재직하면서 대학에서 문명사를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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