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보기 신화와 미술의 오디세이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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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쉬타르의 화신 살로메
  • 서규석 박사
  • 승인 2007.04.15 18: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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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오브리 비어즐리의 작품 ‘공작 옷을 입은 살로메’
인안나와 이쉬타르가 지옥의 일곱 대문을 지나면서 베일을 하나씩 벗는 장면, 이승으로 귀환하면서 사랑하는 남편의 목을 바친 이야기는 1891년 오스카 와일드가 불어로 쓴 희곡 ‘살로메(Salome)’와 리차드 슈트라우스의 살로메를 통해 현대에서 새롭게 태어났다.
살로메는 세례 요한을 사랑하지만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요한에 애증을 느낀다. 이에 반해 에롯 왕은 의붓딸 살로메에게 욕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에롯 왕은 살로메를 차지하려는 욕망으로 자기를 위해 춤을 추면 어떤 것이라도 다 들어주겠노라고 약속하였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베일을 내던지며 춤을 추다 거의 나신이 된 채 에롯 왕의 발 밑에 쓰러지며 내가 원하는 것은 ‘세례 요한의 머리’라고 말한다.
자신의 사랑을 거부한 남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팜므 파탈(femme fatales)’- ‘요염하고 위험한 여인’은 성서에도 나타난다.
살로메의 이야기는 현대무용과 연극으로 되살아났고, 라파엘 전파의 화가 단테 로제티가 그린 ‘시리아의 아스타르테(Astarte Syriaca, 1875-77)’에서 그 우울한 신비감을 맛볼 수 있다.
그는 횃불을 든 두 명의 시종과 함께 명계로 내려간 아스타르테(이쉬타르 여신)가 어둠(명부)의 권력 앞에 옷을 벗기 위에 걸어가는 장면을 그려냈다.
살로메는 1세기 경의 인물로 헤로디아(Herodias)의 딸이자, 현재의 팔레스타인을 다스리기 위해 로마로부터 임명된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의 의붓딸이었다.
성서문학에서 그녀는 요한의 처형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헤롯이 자신의 의붓 동생인 필립과 이혼한 헤로디아와 결혼을 강행하자 세례요한은 모세율법을 어겼다고 하여 안티파스를 비난했고, 그로 인해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고 살로메가 왕에게 세례요한의 목을 베어 달라고 요구했고, 헤롯은 마지못해 명령했다.
이 이야기는 티치아노를 비롯하여 르네상스 화가들의 주된 주제였다.
마졸레노 다 파네칼라(Masolino da Panicale, 1383-1447경)이후 라파엘 전파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의 귀스타프 모로(Gustave Moreau, 1826-1898)가 1876년에 그린 ‘살로메’(옆의 그림)가 있고, 오브리 비어즐리(Aubrey Beardsley, 1872-1898)가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 속에 스케치한 공작 옷을 입은 살로메가 있다(사진).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은 1896년 초연되었고, 낭만파의 마지막 주자였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가 1905년에 오페라로 초연하여 38번의 커튼 콜을 받았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에서 살로메는 요한을 흠모하여 자신의 사랑을 거부하다 죽은 요한의 머리에 키스함으로써 결국 욕망을 채운다.
그리고 베일을 하나씩 벗으며 춤추는 자극적인 ‘일곱 베일의 춤(The Dance of the Seven Veils)’이 슈트라우스의 오페라에 등장하는데, 이것은 이쉬타르 여신이 저승여행을 하면서 일곱 대문을 지날 때마다 왕관, 목걸이, 거들, 속옷을 하나씩 벗는 장면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쉬타르의 저승여행은 성적인 은유를 나타내면서도 신성한 의식으로 제시되었다.
사랑과 활력, 출산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이쉬타르는 살아있는 모든 생물, 인간, 동물, 식물, 자연의 삶 그 자체이며 죽음 뒤에 오는 새로운 탄생을 뜻한다, 그러므로 성을 거부하는 것은 삶을 거부하는 것이 되고, 삶의 즐거움도 발견하지 못하게된다.
이쉬타르 여신이 남편 탐무즈를 찾아 저승으로 여행하는 동안 지상에서의 사랑은 활동을 멈추었다.
사람과 동물 모두 자기 종의 번식을 망각하고, 멸종의 위협에 직면하였다.
사랑과 풍요와 출산의 신이 있는 동안에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살아 있는 가치를 느끼지만 그녀가 없는 경우에는 황량한 것이 된다.
명계의 여왕 엘레쉬키갈이 누구도 되돌아갈 수 없는 지하세계를 찾아와 질서를 위협했던 이쉬타르를 소생시키고 지상으로의 귀환을 허락한 것은 그녀의 존재-사랑과 삶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바빌로니아 인들에게서 성과 사랑은 세속적인 삶인 동시에 성스러운 것이었다.
바빌로니아의 소녀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일생에 한 번은 이쉬타르 신전에서 낯선 남자에게 처녀성을 맡겨야 했다는 성창(聖娼)의식은 이쉬타르 여신에게 의무를 다해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특이한 통과의례였으며 성(聖)과 속(俗)이 혼합된 풍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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