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보기 신화와 미술의 오디세이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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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빅토리아 왕조와 고다이버의 부활(1)
  • 서규석 박사
  • 승인 2007.04.26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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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콜리어의 유화 레이디 고바이버. 콜리어는 영국의 미술과 시에서 등장한 라파엘 전파의 그룹에 속하는 화가로서 1950년 태생으로 이튼에서 교육을 받았고, 레이디 고다이버는 1898년 경에 그린 작품이다.
지금까지 고다이버와 아르테미스 여신, 목욕하는 수잔나에 대한 엿보기와 그 속죄신화, 그리고 그것의 에로티시즘을 언급하였다.
이제 다시 고다이버를 되뇌이며 신화가 된 여인들의 운명과 이를 화폭에 담은 화가들의 상상력을 살펴보며 글을 끝맺으려 한다.
고다이버 신화가 19세기에 재등장하게된 것은 빅토리아 조의 시대정신, 그리고 여왕 자신의 고다이버 이미지로의 변신에 의한 영향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1856년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의 지위가 영국여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인 앨버트 공의 47회 생일기념으로 말 위에 올라있는 여왕의 모습을 그린 유화를 선물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은으로 제작된 고다이버 상(像), 큐피드와 아프로디테상(오른쪽)을 선물하였다.
알프레드 테니슨이 시를 통하여 고다이버를 대중화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면, 여왕의 고다이버 상의 선물은 국가지도층이 고다이버 신화를 받아들였다는 의미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되기에 충분하다.
이 선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남편인 앨버트 공이 자신을 고다이버와 아프로디테의 이미지로 생각해주길 바란다는 표시였다. 생일선물에 보내진 고다이버 이미지는 여왕의 계산된 선물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공적으로 대영제국을 대표하는 여왕이지만 한편으로는 한 남자의 아내로서의 지위가 있다.
빅토리아 여왕이 생일선물로 이 같은 대상을 선정한 것은 미적인 판단을 넘어선 것이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고다이버 신화는 일반인에게 너무 잘 알려지게 되었고, 예술적인 표상으로, 문화적인 가치로 유포되기에 이른다.
빅토리아 여왕풍(風)의 고다이버 이미지는 사회로부터 기대되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사적인 역할을 넘어서 일종의 결혼생활에서 드러나는 갈등을 사회적으로 완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앨버트 공이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받은 고다이버 상은 여왕의 순종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결혼이 여성의 성숙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어머니로서의 여성은 남편을 위해 가정을 가꾸는 것이 제일 큰 임무였다면, 고다이버 상을 선물한 것은 여왕이 강조하고 있는 가정에서 덕을 베풀고 어린이를 양육하는 여성의 덕목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여성이 말을 타는 것은 오늘날에도 성적인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19세기형의 고다이버 버전은 남편이 제시한 조건들을 그대로 따른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여왕이 부군에게 고다이버 상을 선물한 것은 비록 신분상으로 여왕이라는 특별한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앨버트 공의 충실한 아내임을 드러내고자하였던 것이다.


서규석 씨는 중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서 사회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자치경영개발원에 재직하면서 대학에서 문명사를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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