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경주세계문화엑스포2006’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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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 문명의 위치(2)
  • 서규석 박사
  • 승인 2007.02.12 19: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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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톰의 중심사원 바욘 사원의 불두(佛頭). 중생의 어려움을 어루만지는 관음보살의 모습으로서 자야바르만 7세의 자화상이며 인간적인 조각 모티브가 돋보인다.
▲9세기에 등장한 앙코르 왕조

7세기 말, 수마트라 섬의 팔렘방에서 슈리비자야가 탄생하고 급속히 발전한 것과 때를 같이 하여 부남국은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국제질서의 새로운 재편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였다.
캄보디아에서 8세기는 무정부 상태로 들어섰고, 국가는 고지대와 저지대로 분할되었다.
참파에서는 중앙세력이 남부지방으로 후퇴하였다.
8세기 후반, 도서부에서는 불교를 숭배하는 왕조가 출현하였다.
시바신앙을 신봉하던 군주를 갑자기 대체하며 등장한 새로운 왕조는 ‘산의 왕’(샤일렌드라)이란 칭호를 회복하고 위대한 불교 기념물로 국토를 뒤덮었으며, 남해 지방에서부터 캄부자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헤게모니를 행사하였다.
이 혼란기는 중국에서는 당(唐)의 황제들이 즉위한 직후였고, 또한 자바에서 불교 왕조가 정점에 있던 시기와 일치한다.
아울러 인도 본토의 팔라 왕조 및 벵갈의 나란다 대학의 영향 아래 대승불교가 동남아시아에 확장되는 시기였다.
9세기에 자바에서는 불교를 신봉하는 샤일렌드라의 세력이 점진적으로 약화되었다.
이 세력의 약화는 크메르 왕국의 부활을 촉진시켜, 자바의 종주권으로부터 해방되어 802년에 앙코르 왕조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4세기에 걸쳐 동남아시아에서 주도적인 강대국의 하나가 되었다.
9세기 말과 10세기에 이르러 앙코르의 문명은 본격적인 꽃을 피웠고, 참파 왕국의 중심은 쾅남(廣南)지방에서 재건되어 인드라푸라 왕조를 세웠다.
이러한 발전은 당나라 말기와 5대 왕조의 출현 등 중국의 통제력이 약화된 시기와 때를 같이 하였다.

▲11세기 초반의 위대한 국왕들

11세기의 3/4분기 초기에는 개성이 강한 강력한 군주들과 위대한 결과를 가져온 사건이 많았던 시기였다.
캄부자에서는 수리야바르만 1세가 1002년에 새로운 왕조를 수립하고 메남 강까지 종주권을 확대하였으며 이전부터 이 지역을 점유했던 몬 인을 희생시켰다.
그의 통치기는 자바의 에를랑가 왕의 치세와 정확히 중첩된다.
에를랑가 왕은 슈리비자야의 공격적인 정책에 의하여 무정부 상태에 빠진 자바를 구원하고 재정복한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1025년경에 촐라 왕조의 침략으로 슈리비자야가 일시적으로 약화된 기회를 이용하여 오래된 적대국을 수마트라에 묶어 놓고 그 동맹국들을 강제로 분산시켰다.
수리야바르만 1세와 에를랑가 왕이 11세기 중반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질 무렵, 파간의 아노라타 왕은 이라와디 강 델타 지대를 정복하고 소승불교를 포함하여 몬 인의 문명을 국내에 이식하였다.
11세기 말에 중국에서 송 왕조의 쇠퇴는 크메르, 참, 미얀마의 군주들에게 야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캄부자에서는 1080년에 건설된 새로운 왕조가 앙코르 와트를 세운 정복왕 수리야바르만 2세의 통치 아래 최초로 국가권력의 정점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망이후 국가는 파괴의 위기를 맞게 되고 1177년에는 참 인에 의해 앙코르가 점령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미얀마에서는 아노라타 왕의 후계자들이 국가를 확장하고 그 수도를 사원으로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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