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봄의 꼬리
[문화칼럼] 봄의 꼬리
  • 김종미 시인
  • 승인 2013.03.17 19: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 3월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여전히 두꺼운 옷을 벗지 못하는 형편이지만 가슴을 파고드는 바람을 막으려 옷깃을 세우고 바라보는 가로수에서는 수상한 기운이 감도는 것을 느낀다. 어김없이 봄은 오고 있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는 봄

어제는 봄기운을 느끼려 장산에 올랐다. 가로수의 전언을 믿고 옷차림을 가볍게 하고 나섰다가 그만 감기에 걸려 버렸다. 봄은 어느 계절보다도 은밀히 온다는 것을 깜빡 잊어 버렸던 것이다. 언 땅 밑으로, 두꺼운 수피 밑으로 척후병처럼 왔다가 순식간에 세상을 점령해 버리는가 하면 또 사라져 버리고 없는 게 봄 아닌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는 것이 봄이라면 지금이야말로 봄을 느낄 때다. 소리를 수집하는 자세로 산을 살펴보았다. 오는 봄보다 더 은밀하게 봄을 만져 보았다. 눈을 감은 듯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는데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계곡도 없는 곳에서 물 흐르는 소리라니! 그것은 나무 둥치 속에서 나는 소리였다. 허만하 시인이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고 하였던가. 밑둥치에서 잔가지 끝까지 물 흐르는 소리가 숲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문득 차가운 공기의 결과 결 사이 부드러운 훈풍이 만져졌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은 각양각색이다. 체력 자랑이라도 하듯 씩씩하게 산을 오르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좀 느릿느릿 산을 오르는 게 좋다. 이제 막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친구와 산행을 간 적이 있다. 속도감 있게 제법 산을 잘 타는 친구였는데 작은 들꽃의 얼굴을 면밀히 살피는가 하면 못생긴 돌에서도 매력을 발견하려 하고 기겁을 하던 거미에게도 다정하게 렌즈를 갖다 대었다. 산을 오르며 나뭇가지의 각도가 얼마나 아름답게 구부러졌는지 탐구하는 친구의 얼굴이 아름다웠다. 친구는 ‘사유하는 나 자신’이라는 친구를 사귄 것이다. 덕분에 친구는 이제 봄이 없어졌다고 한탄하는 대신 한 발 앞서 봄을 마중 나갈 것이다.
내가 한 발 앞서 봄을 마중 나가는 곳은 해운대 달맞이고개이다. 6년 전 괴정에 살 때도 봄만 되면 달맞이고개를 못 넘어 안달이었는데 해운대에 이사 오고 나서부터는 봄이면 거의 매일 달맞이고개를 넘는다. 노란 개나리 피고 연분홍 벚꽃 피고 연둣빛 새잎이 돋아나고 진달래라도 군데군데 동참하면 봄 바다의 푸른색은 기가 막히게 관능적인 색채를 띤다. 혼자 보기에 아까운 그곳이기에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백 살 외할머니와 팔십을 바라보는 친정엄마를 태우고 드라이브를 한 적이 있다. 내 기대와는 달리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와 엄마는 풍경에 관심이 있는 둥 마는 둥 수다 떨기에만 바쁜 것 같았다. 내가 “할머니, 저것 좀 봐요” 하면서 안타까워하면 “눈으로 보지 입으로 보나” “내, 다 보고 있다” 하시더니 밥을 먹고 나와 식당 정원에 앉아 계시는 할머니의 두 눈이 그렁그렁한 게 아닌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미야, 고맙다” 하신다. 백 살 할머니가 맞이하는 백 번째의 봄. 그 후로 두 번의 봄이 더 지나갔다.

나이 들수록 아름다워지는 것

그토록 당당하고 기품 있으시던 외할머니도 뼈와 가죽만 남은 채 지금은 거동도 잘 못하시는 것을 보면 나이 들수록 아름다워지는 것은 이 세상에 나무뿐인 것 같다. 나이 먹을수록 힘차고 우아한 곡선을 만들어내는 소나무, 은행나무, 팽나무 같은 것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벚나무도 수령이 깊을수록 깊이 있고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나이 들수록 나약하고 초라해지는 인간이지만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만이 ‘존재란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라고 하였다. 이 말은 인간은 노력하기에 따라 내면의 수령을 아름답게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로 해석하고 싶다.
오는 주말엔 옷을 단단히 챙겨 입고 다시 장산을 올라야겠다. 그러면 발칙한 봄은 이번엔 내가 옷을 하나씩 벗게 만들지도 모른다. ‘아, 봄이 왔구나!’라고 생각할 때 꼬리를 감추는 봄은 그야말로 발칙하다. 요놈의 꼬리를 이번엔 제대로 한번 잡아 봐야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