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일논단] 뻔뻔한 일본, 야스쿠니
[충일논단] 뻔뻔한 일본, 야스쿠니
  • 서중권 편집이사
  • 승인 2013.08.18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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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설국>을 영어로 번역해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미국인 번역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는 <도쿄이야기>(1983년)라는 책을 통해 근대화 시기 도쿄의 모습을 소개한 적이 있다. 이 책에는 초창기 야스쿠니(靖國) 신사 이야기가 나오는데 찬찬히 읽어보면 야스쿠니 신사가 처음부터 논란에 휩싸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869년 세워진 쇼콘샤(招魂社)를 모태로 하는 야스쿠니 신사는 직무 중 국가를 위해 사망한 사람들의 영혼을 모시는 것이 표면적인 설립 이유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메이지(明治) 일왕을 막부세력으로부터 지키다 전사한 관군의 영혼을 기리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야스쿠니 신사는 1879년 쇼콘사에서 야스쿠니로 이름을 바꾼 후에도 일왕과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이는 누구든 신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논리로 전쟁 희생자를 재창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일본 정부는 야스쿠니 신사 주변에 다양한 오락거리를 만들어 군국주의 이미지를 희석시켰다. 대표적인 것이 경마장인데 1896년 가을에는 말 268마리가 출전하는 대규모 경마대회가 열렸다. 스모 경기장은 물론 일본 전통 연극의 하나인 노(能) 상연장까지 경내에 생겨났다. 청일전쟁 직후 야스쿠니 신사 참배자는 연 1000만명에 달했다. 일본 정부가 야스쿠니 신사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전쟁에서 세 아들을 잃은 주부가 1941년 발간된 잡지 <주부의 벗>에 “우리 같이 천한 산골 사람들이 죽으면 너구리도 울어주지 않는데, 천황 폐하가 나라를 위해 죽었다고 참배해주는 것을 보고 감전된 듯한 기쁨과 고마움을 느꼈다.”고 기고한 글은 야스쿠니 합사자 신격화의 성공 사례로 꼽힌다.
그러나 사이덴스티커는 “(야스쿠니 합사자 중) 도쿄 출신은 언제나 전국 평균을 밑돌고 있다.”며 “에도(도쿄의 옛이름) 토박이는 나라를 위해 죽는데 그다지 열심이지 않았던 것 같다.”고 <도쿄이야기>에서 지적했다. 일왕에게 목숨을 바치면 신이 될 수 있다는 논리가 사회 전반의 공감을 얻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일본이 1945년 패망한 뒤 단순한 종교법인으로 전락한 야스쿠니 신사가 또다시 관심을 모은 것은 1978년 10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비롯한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을 합사하면서다.
한국과 중국 등 주변 국가들의 반발이 거세자 야스쿠니 신사에서 A급 전범만을 따로 떼내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러나 야스쿠니 관계자들은 “A급 전범의 혼령은 기존 246만여명의 혼령과 하나의 덩어리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들만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맞서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8ㆍ15 광복절날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보류하기로 해 주변국을 배려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후루야 게이지(古屋圭司) 납치문제 담당장관 등 각료들은 참배 의사를 밝히며 외교가의 반응을 살피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총리를 비롯한 일본 각료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국가 및 그 기관에 의한 종교활동 금지를 규정한 헌법 제20조에 위배될 소지가 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根康弘) 전 총리가 1985년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 참배한 행위가 시민단체가 제소한 소송에서 위헌 가능성을 이미 지적받은 적이 있다.
그런 점에서 15일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려는 일본의 각료들은 자국의 헌법마저 무시하고 무력화하려 한다는 비판을 면치 못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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