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복의 孝칼럼] 심청전에 나오는 효 이야기
[최기복의 孝칼럼] 심청전에 나오는 효 이야기
  • 최기복 충청효교육원장·성산 효대학원 교수
  • 승인 2014.03.13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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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이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공양미 삼백석에 목숨을 판다. 목숨 값으로 지불된 삼백석의 공양미는 몽은사에 시주하여 부처님의 월력으로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는 값이다. 당시 심청이의 지극한 효심에 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자 함이 아니요. 소설의 허구를 논하고자 함이 아니라 심청이의 선택 부문에 관해 효행의 선택 윤리를 이야기 해야겠다.
자신의 두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딸이 목숨을 버렸다. 딸의 목숨값으로 두 눈을 뜨고 세상을 살아가는 아버지와 효심덩어리인 딸의 지극 정성스러운 보살핌 속에서 딸과 함께 맹인으로서 사는 삶을 비교해 본다면 어느 것이 더 행복할까? 심청이의 선택은 잘못된 선택이고 어리석은 우를 범했다.
또 하나 장승상댁 부인이 수양딸로 삼아 공양미 삼백석을 대납해 준다는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눈도 뜨게 해드리고 수양딸로 살면서 아버지 봉양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기회를 왜 마다한 것인가?
효를 행함에 있어서 똑같은 행위를 해도 하나는 불효가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일반적으로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는 것은 효행이다. 그러나 금명간에 부도를 낼 수밖에 없는 아들이 거액의 용돈을 부모님에게 드린다면 이는 불효다. 부모의 마음속에서는 부도날 아들이 금후에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은 아닌지 용돈을 받는 순간부터 노심초사 할 수밖에 없다.
심청이의 선택은 효행이 아니라 부모의 심장에 뽑아낼 수 없는 칼을 꼽는 행위다. 평생을 자식 잡은 아버지로서 살아가게 한 패륜을 저지른 것으로 봐도 마땅하다.
설 명절 부모님 뵈러 오다가 온 가족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고 가정해 보자. 부모는 설 명절이 평생 원수 같을 것이고 1년에 한 번이나 두 번밖에 볼 수 없는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님들에게 설 명절이 참으로 고마울 것이다.
효행이 선택적 결과에 의해서 효도 되고 불효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공자께서는 효에 관하여 수많은 질문을 받았다. 단 한 번도 동일한 경우에서 동일한 답을 하지 않으셨다.
“네가 네 입으로 효를 효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효가 아니다.” 내가 행하고 자하는 효행의 수급행위에 있어서 공급받는 자와 공급하는 자의 관계를 고민하고 정신적인 것이냐 물질적인 것이냐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무턱대고 내 위주로 생각해서 공급하는 효의 용역이나 재화가 피공급자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고민을 드리는 일, 마음을 불편하게 해드리는 것이 아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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