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복의 孝칼럼] 대과(大過)와 효
[최기복의 孝칼럼] 대과(大過)와 효
  • 최기복 충청효교육원장·성산 효대학원 교수
  • 승인 2014.03.27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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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사회에서 소임을 마치고 임기가 만료되어 물러날 때 “대과(大過) 없이 소임을 마칠 수 있게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합니다.
주역의 해설서(解設書)를 보면 삼대의 죽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청와대 언론 창구 역할을 했던 윤모 씨가 업무 중 저지른 일련의 사태는 대과입니다.
대과를 통하여 윤모 씨의 아버지와 당대인 본인과 그 자식이 누구의 자식이냐가 알려지면 연좌제적인 처벌은 필연적으로 따르게 됩니다. 물론 본인은 형사적 처벌 대상이지만 그 부모와 자식은 본인의 행위로 인하여 손가락질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삼대의 사망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해당 집안의 아들이 똑똑하고 미래지향적이라 하더라도 그 아버지 때문에 사돈을 맺는 것을 꺼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효는 인내를 필연적으로 수반합니다. 인내의 내면에 숨 쉬고 있는 것이 자제입니다. 동물적인 본능을 이겨내지 못하고 하고 싶은 대로하는 사람은 효자가 될 수도 없고 효자가 아닌 사람이 효행을 할 수는 없습니다.
치매 환자를 둔 자식이 하루나 이틀은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할 수 있으나 그 이상 생업을 전폐하고 병수발에 매달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 속담에 병수발 3년에 견디어 내는 효자 없다고 합니다. 효행이란 인내 하에서만 가능한 것이지요.
자신에게는 인내를 위한 강인한 자기체면을 드라이빙 해야만 가능한 것이니까요.
나는 효자다! 효행은 인내다! 인내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자신의 육체가 원하는 동물적 욕구를 인내하지 못한 윤모 씨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의 경우 또한 가장 큰 문제가 가정교육을 함에 있어서 인내 교육을 가르치지 않은 데서 발생합니다.
한 대의 회초리에 선생님에게 대든다, 친구간의 호불호에 이유 없이 주먹이 나간다, 잘 되라고 하는 부모의 말씀을 잔소리라 하고 집을 뛰쳐나간다.
어른들의 잣대로는 측량이 어려운 현실 때문에 노소간의 간격은 점점 더 넓어집니다.
필자는 해병대 장교 교육을 이수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맛 보곤 했습니다. 그 한계 가 인내였습니다. 동기생 중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여 그 삶이 처절할 만큼 나락의 경지에서 허우적대다가 빛을 보지 못하고 져버린 친구를 보면서 한 생각이 ‘참을 수 있는 한 참았어야 했는데’이었습니다.
효행 또한 참아 내는 것, 그것도 한계에 이를 수 있을 때까지… 인내에 급수를 매긴다면 인내의 급수와 그 열매는 비례한다는 것입니다. 효행의 결과는 자신의 인생을 바꾼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부모와 형제를 위하여 열사의 나라 중동에서 땀 흘린 사람들, 서독에 파견되어 간호사라는 이름으로 광부들의 시신을 닦아 내던 사람들, 왜 그렇게 힘든 일을 자처하였느냐고 묻는 기자들 앞에 서슴지 않고 한 대답이 내 부모 형제 처자를 위해서입니다. 그들의 입에서 조국이라는 말은 그 후에 나왔습니다.
그분들은 하나같이 잘 살고 있습니다. 그분들 덕분에 우리는 경제대국 10위권에 랭크되었습니다. 효행이란 이토록 엄청난 결과를 창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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