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복의 孝칼럼] 효의 어제와 오늘
[최기복의 孝칼럼] 효의 어제와 오늘
  • 최기복 충청효교육원장·성산 효대학원 교수
  • 승인 2014.07.10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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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효는 어렵다.
할고단지(割股斷指)의 효란 허벅지 살을 떼어 내어 굶주림으로 인하여 죽음 직전의 아비를 살리고 또 하나 숨이 넘어 가는 마지막 순간에 손가락을 칼로 베어 어미의 입에 피를 흘려 넣어 잠시라도 눈을 뜨게 하는 것을 말한다.
시묘살이란 돌아가신 묘역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아침 저녁으로 밥을 지어 올리며 호곡을 하는 것이다.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할 수도 없는 일이고 효도를 행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효자는 으레 그렇게 하는 것으로 여겨왔다.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나라에서 굶어 죽는 것도 방치하지 않겠지만 의학적으로 근거없는 단지 행위도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전국적으로 모자라는 산야를 묘터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입법 취지 하에 화장문화가 주가 되어 있는 현실에서 묘역에 움막을 짓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다. 부모를 모신다는 점, 봉양함에 있어 최선을 다한다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오늘의 효는 쉽고 재미가 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가장 명강의로 소문이 난 마이클 칙센트 교수의 행복학의 내용이기도 하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칭찬 받을 일이고 내가 즐거이 행할 때 나는 최고로 행복하다.
효를 수급 행위로 볼때 공급자인 자식이나 이해 당사자를 ‘갑’이라고 칭하고 수요자인 부모나 노약자를 ‘을’이라고 칭하자.
사회적 상식으로 갑은 강자고 을은 약자다. 효라고 이름지어 제공하는 재화나 용역은 갑이 공급하고 을이 이를 받는다. 일반적인 거래 행위에서의 수급 행위는 감정이 없다. 다만 효의 수급 행위는 가장 지순한 인간 본성 중 착한 마음의 발로를 통하기 때문에 감정적인 행위이다. 주는자는 의무감에서의 행위가 아니라 그 자신이 즐거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받는자 또한 큰 조건이나 제약이 없이 부담없이 받는다.
주는자와 받는자가 즐거움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마이클 칙센트 교수의 긍정적 심리 접근법에서는 상호 긍정적인 마음으로 인한 인정하고 인정받는 즐거움을 행복이라고 했다.
그들 나라에서는 효에 관하여 앞서 열거한 어제의 효는 절대로 효가 아니다. 일방적 희생과 봉사는 받는자에게는 부담이요 주는자에게는 엄청난 희생이 강요되기 때문이다.
그 방법은 소통을 위한 대화이다.
중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효를 가르쳤다. 학생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부모님에게 어떤 효도를 했는냐?”
“심부름 했어요. 생일 날 케익 사드렸어요. 노래도 불러 드렸어요. 안마도 해 드렸어요”
나는 그들에게 50점에서 60점을 준다.
“마음을 기쁘게 해드렸어요. 일등한 성적표를 보여 드렸어요” 70점을 준다.
“100점짜리 효도는 뭐예요” 부모님과의 대화다. 듣고자하는 말씀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을 잘 듣는다.
그 말씀 속에는 여러분의 꿈과 끼를 향한 염원이 있다. 바로 여러분이 하고자 하든가 되고자 하는 직업이나 기타 미래에 관하여 함께 공유하는 일이 100점이다.
오늘의 효는 어렵지 않다
부모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공동의 목표를 정하고 부모와 함께간다. 내 꿈의 반려이자 동반자인 부모는 가장 소중하다. 이를 돕는 선생님도 너무 고맙다. 경쟁상대로 함께 존재 해주는 크라스 메이트 또한 고맙다.
오늘의 효는 어렵지 않다. 심지어 고통도 함께 분담하면 나이든 부모님에게는 살아야 할 이유를 드리는 것이기도 하다.
이 아니 행복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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