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복의 孝칼럼] 돌아온 탕아
[최기복의 孝칼럼] 돌아온 탕아
  • 최기복 충청효교육원장·성산 효대학원 교수
  • 승인 2014.07.24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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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천안의 변두리 목천읍 대로변에 충청효교육원이라는 제법 큰 입간판을 세웠다.
대전에는 대전 효지도사 교육원이 있다. 나는 거기 출신이다. 1기로 등록을 했고 수강생 모집이 난관에 봉착했을 때 스스로 운영위원장이 되어 오늘의 대전 효지도사 교육원에 희망의 불씨를 지피기도 했다. 이제 대전은 2000명에 가까운 효지도사를 배출했다.
260억의 국비로 효공원(구 뿌리공원)에 효문화 진흥센타가 세워진다. 2011년 가을날 대한민국 효교육의 전도사 성산 효대학원 대학교의 최성규 총장께서 충남에도 효교육원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산파노릇을 해야 한다는 당위를 말씀하셨다.
대전에서 시작해도 된다는 말씀이셨다.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대전에는 오원균 원장이 계신다. 개인적인 출혈을 감내하고 계시는데 도와는 못 드릴지언정 그럴수는 없다. 충남에서는 연고도 없고 능력도 모자란다. 두번 세번 거절을 했다. 거절하다가 네번째로 오원균 원장님에게 서 허락하신다면 재고해 보겠다고 했다. 어느날 오원균 원장께서 전화가 왔다.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최성규 총장께서 설득을 하신 것인지는 몰라도 썩 내키지는 않았다. 나는 대전 서구 괴정동의 순복음 중앙교회 효피플 센타에서 충청효교육원 2급 효지도사 과정 제 1기생 교육을 시작 했다. 52명이 등록을 마쳤고 출강하시는 교수님들께서도 비교적 명강의로 감동을 나누어 주었다. 그것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효는 만신창이의 인생, 어떻게 생각하면 낭인이 되어 착지를 잃어버린 박제된 천재의 심장에 호흡을 불어 넣어 주는 일이 되었다. 멈춘 피돌기를 시작하게 하는 일이었다. 천안삼거리에는 충청효교육원이 이사 오기를 기다리는 1600평의 대지에 200여 명의 교사(교육장)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준비된 땅과 교실은 소유가 바뀌었다. 나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내 힘으로 천안의 변두리 목천읍 338의 3번지에 효 교육원의 둥지를 마련하였다. 물론 총장님의 귀한 도움이 없었다면 힘이 부쳤겠지만…
세상은 온갖 비리와 부조리와 비인간적 인간들로 가득차 있음을 체감하고 대처능력을 상실한 나는 정치적 탕아였다. 모든 사람이 각자 던져진 위치에서 주어진 길을 가야 하는것이 당위였다면 나는 탕아의 길을 가야 했으리라. 내가 수강생들에게 말한다. 효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효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어머니로부터 본받는 교육이다. 본이 사라져 간다. 정치적 탕자가 본의 본이 되어야 한다. 먼 길 돌아 돌아 효를 만난 셈이다. 관념의 효가 아니라 행위가 수반 되는 효다.
어렵게 돌아 온 길목에는 360여 명의 효우들이 교육원장을 돌아 온 탕아라고 부른다. 그들을 사랑한다. 이 나라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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