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복의 孝칼럼] 미생이냐? 완생이냐?
[최기복의 孝칼럼] 미생이냐? 완생이냐?
  • 최기복 대전하나평생교육원장·성산 효대학원 교수
  • 승인 2015.0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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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판 용어 중에 미생이냐 완생이냐를 이야기 한다.
아생연후 살타를 많이 사용 한다.
흑과 백으로 나누어져 한점 한점 두어 가면서 내가 만든 집(방)이 많으면 승자요, 적으면 패자가 된다. 고수들일수록 상대의 수를 읽으며 손익을 계산하는 속도가 빠르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를 우리는 평생이라고 한다. 비명횡사하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하늘이 준 명이라고 봐야한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을 놓고 우리는 미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바둑판에서 승패가 갈리고 나면 다시 판을 시작하는 것처럼 우리의 생이 끝나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일까?
바둑판에서는 상대가 감히 쳐들어 올수 없이 집을 내면 완생이라고 한다.
우리 인생에서 내 주변과 이웃과 사회, 국가가 나를 완전하게 지켜준다면 내 한평생은 완생이라고 봐야 할까?
뺏고 빼앗기는 경쟁사회 속에 뼈가 굵어 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용자와 고용자 간에 있어서 그들은 계약을 체결하지만 그 계약을 항상 갑이 우위에 있게 마련이다. 대등한 입장에 서서 당당하게 체결된 계약이라도 갑질은 으레 존속되어 왔음이 사실이다.
대한항공의 전 부사장 조현아의 땅콩 회항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되나를 곱씹어 본다.
세월호 사건의 선장이나 승무원들의 부당한 처사로 야기된 사건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바둑판의 기사들은 승복부터 배운다.
패배가 미덕일 수 있음을 통하여 그들은 선의의 경쟁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감옥에서 재판을 대기하고 있으면서 후회를 할까 재수 탓을 할까.
돈 가방을 들고 도망을 결심했던 세월호 선주는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했다면 밭고랑에서 시신이 되는 것보다 스스로 마지막을 법의 심판대를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의 삶은 영원한 미생이다.
한 평생을 바람직하게 살다간 사람들의 삶은 완생이다.
착한 일에 매달려 살다간 완생의 삶은 아무에게나 존재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필요한 것을 발명하여 만들어 주는 사람, 세상을 선량하게 만들어 가기 위하여 인성교육을 부르짖고 몸소 시현하는 사람은 완생을 향해 가는 사람의 삶이다. 기어이 빼앗고 차지하고 입으로는 온갖 사탕발림으로 사람을 속이고 뒷거래와 사술에 능한 사람은 그 끝은 자식대에 가서라도 보복을 받을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죽는 날까지 미생이다.
세상에 탐나는 것을 두고 눈을 감아야 하는 사실을 그들은 모른다. 과욕으로 얼룩진 심성이 결코 선량해 질 수 없음을 그들은 모른다.
내가 살고 나서 상대를 잡아야 한다는 아생연후에 살타는 내가 사는 것을 모토로 하기보다 욕심을 삼가라는 교훈이다.
우리 모두는 함께 사는 법. 함께 살아야 행복하다는 것. 함께 사는 것이 완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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