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복의 孝칼럼] 탈북자의 삶
[최기복의 孝칼럼] 탈북자의 삶
  • 최기복 대전하나평생교육원장·성산 효대학원 교수
  • 승인 2015.03.19 19: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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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다.
인간은 자연 앞에 평등하다.
인간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 존 로크나 홉스의 사회계약설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인간은 상호 간에 계약을 하는 지성적 동물임을 설파했다. 허나 예외는 무수히 많다. 아프리카에서는 기아에 아사하는 어린아이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미국인들이 매일 먹는 햄버거 반쪽만 아껴도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평균수명이 40살이 안되는 나라. 에볼라를 신의 저주로 여기며 그 퇴치를 위하여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을 저주하며 죽이는 행위를 서슴치 않는 미개인들이 지구의 한 귀퉁이에 엄연하게 존재한다. 지구촌 사람들의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또한 그들은 태생의 한계 속에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지구상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대한민국. 7000만 민족의 태생적 한계는? 그 좌표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압제 속에 굶주림 속에 사는냐 죽느냐의 기로에서 선택한 것이 탈북이다. 우리는 하기 좋은 말로 “거기(북)에도 사람 사는 곳인데”라고 말하지만 그들 탈북자들의 말을 빌려 들으면 그곳은 사람 살기 힘든 곳이라고 한다.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고 제3국을 통해 꿈에 그리던 자유대한의 품에 안겼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거의 무제한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다. 그러나 새장의 새가 오래되면 창공을 나를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은 자유의 향연에 취하기도 전에 어리벙벙해질 수밖에 없다. 스스로 새터민이라는 이름으로 둥지를 틀고 탈북자 끼리의 관계를 형성해 가며 향수도 달래고 압제 받는 시절을 회고하면서 잘 살아 보자고 결의도 다진다. 똑같이 그들은 대한민국의 국적을 가진 동포가 되었다.
허나 그들을 대하는 우리들은 그들을 외계에서 온 사람들로 취급하는 것은 아닌가.
예로서 필자가 접한 36세의 박정필이라는 탈북자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그가 일용 노동자로 옥포의 조선소에 근무 중 폭행을 당해 전치 6주의 중상을 입고 대인기피증에 걸려 신음하고 있다고 한다. 관계당국에 사실을 알렸다고 한다. 그 무성의는 극치를 이루고 가해자와 증인은 오히려 적반하장의 모습으로 오히려 피해자에게 겁을 준다고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자. 가해자도 저층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사회에서 당한 만큼을 무지한 탈북자에게 보복하는 인성이 문제다. 너도 그런데 나라고 못할까? 당한 사람보다 가해자가 우리를 더 슬프게 한다. 함께 막노동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 동병상련은 커녕 막가파식 행동을 서슴치 않고 있다니... 이들의 이런 작태를 지속하고 있는 동안 차상위 계급과 3D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을까. 항변 능력도 변호사도 선임할 수 없는 자들을 위한 법률 구조공단 유무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을 어떻게 구제해야 하나?
이것이 탈북자의 삶이라면 최근 정착자금 받아 생활하다가 다시 유랑인이 되어 제3국으로 떠나는 모습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인자한 형님 노릇으로 동독을 통일의 대열로 이끌어 통일 독일을 이룬 서독에서도 이렇게 했을까를 생각해 본다.
인성이 사악한 지도자로는 세계 2차 대전의 원흉인 히틀러를 들 수 있다. 다음 순위는 친 고모부를 한치의 고려도 없이 즉살한 이북의 지도자를 들수 있다.
세습정권의 연장을 통하여 인권의 사각 지대인 북한에서 온 그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다운 사람 대접을 받고 사는 일이다. 바쁘고 살기가 힘들어도 우리보다 더 살기 힘든 그들에게 눈을 돌릴 때가 되었다. 눈을 돌리는 것이 인성이고 사람다운 일이기 때문이다. 무관심 속에 떠나고 다시 이북을 그리워하게 한다면 이는 모두 우리의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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